분명 돈이 많았는데 없어졌다.
“돈이 줄어드는 속도가 어마어마해!!”
정기적으로 받는 월급 없이 모아둔 돈으로 사니 돈이 줄어드는 속도가 어마무시했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번뜩 들어야만 했다.
2020년 2월 둘째를 낳고 부부가 함께 육아휴직을 낸 걸 시작으로 우리의 밀착육아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나는 공기업에 다녀 아이당 3년, 총 6년의 육아휴직을 쓸 수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실컷 옆에 있어주고 싶어 남은 육아휴직 5년을 한꺼번에 회사에 신청해 사용 중이다.
남편은 육아휴직 1년만 쓰고 복직했다. 복직한 지 두어 달이 지났을 즈음, 어느 날부터 남편의 표정이 어두워져 갔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다.) 조금 더 참고 근무를 하다가 결국 내게 말했다.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나라에서 나오는 육아휴직 급여는 매달 조금씩 떼어놨다가 복직 후 6개월이 지나면 한꺼번에 준다. 남편이 조금만 더 근무하면 나라에서 챙겨둔 우리의 돈 몇백만 원이 지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얼굴은 단 하루도 다니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워낙 신중한 성격에,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는 그이기에 오죽하면 저럴까 생각했다. 결국 나는 그깟 돈보다 여보의 정신 건강이 더 중요하니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 내겐 여보가 더 소중하다며.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랬던 것 같다. 당장 돈이 없는데 정신건강 운운하며 그만두라고 할 수 있을까? 부동산 투자로 돈이 좀 있었던 상황인지라 당연히 마음에도 여유가 있었던 것 아닐까?
솔직히, 남편이 힘들다고 할 때 쿨하게 그만두라고 할 수 있었던 건 남편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다기보다는 돈에서.. 나왔던 것 같다.
그렇게 남편은 아예 회사를 그만두었다. 부부의 본격적인 육아 라이프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회사에 다니지 않으며 부동산 투자로 생긴 돈으로 생활비를 쓰고 아이들을 키웠다. 첫째는 영유도 다녔다.
고가의 명품을 사고 그런 건 아니지만(다행히 그런 욕심은 없다), 사고 싶은 게 있을 때 큰 고민 없이 살 수 있었다. 운동을 하고 싶어 필라테스도 다녔고, 골프를 배우고 싶어 레슨도 받았다. (나랑은 맞지 않은 스포츠라는 걸 깨닫고 금방 때려치웠다.)
그렇게,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을 벌러 힘들게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정말 놀랐다.
‘돈이 이렇게 빨리 줄어들 수 있구나.’
돈이 줄어드는 속도를 알아차리며 정신도 차렸다. 대단하게 사치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면 안 되겠구나 라는 반성을 뼈저리게 해야 했다.
그리고 다행히 그즈음부터 돈에 대한 나의 관점이 달라졌다. "여보 나는 어차피 사고 싶은 것도 별로 없어. 막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없어. 그냥 지금 이 정도가 좋아." 나의 이런 변화를 남편은 두 팔 벌려 환영했다. 40 즈음에 정신을 차려 다행이란다. 축한대나 뭐래나.
지금 우리는 돈 쓸 일이 많이 없다. 예쁜 옷을 사고 싶어 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했던 나는 이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좋아졌다. 필라테스와 골프를 배우던 나는 이제 달리기를 좋아한다.
40대가 되며 본질에 충실한 삶을 살려고 하다 보니, 좋아하는 것도 참 가벼워졌다. 읽고 쓰고 달리는 데는 돈이 별로 들지 않는다. 일상에 감사하다보니 더이상의 돈이 필요하지가 않다. 행복한 삶의 본질이 그렇다.
돈을 원 없이 써봤더니 그 끝에는 만족이라는 게 없다는 걸 알았다. 물질이란 것은 당장 가졌을 때만 좋을 뿐 단 며칠 만에 그 기쁨은 사라져 버린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그 찰나의 순간을 추구하며 사는 삶은 얼마나 애처로운가.
자녀교육도 마찬가지다. 물론 아이가 영어를 좋아해 영어유치원을 보냈지만 그 외에 사교육은 시키지 않으니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들지는 않았다. 다른 학습 학원을 다니지 않는 이유는 아이들의 자유 시간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은 우리 아이들은 둘이 상황극을 하거나 집에서 종이를 접어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상황극과 글쓰기. 아이들 발달에 얼마나 좋은 놀이인가.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는 대표적인 놀이이다. 그런데 돈이 들지 않는다. 교육의 본질은 '생각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에 집중하니 사교육비도 별로 들지 않는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본질을 찾으려는 태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기 '고집'이 있어야 한다고. 자기 고집이 있으려면 자신의 생각이 바로 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 무언가에 몰입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어야 한다.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생각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다 나만의 인사이트를 만나야 진짜 삶을 살 수 있다.
나는 내 아이들이 그렇게 자랐으면 좋겠다. 포장에 지나지 않는 스펙을 쌓기보다 배움의 즐거움을 아는, 본질을 향한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키우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자유 시간을 주면 된다. 도서관에 가면 된다. 너무 좋아하는 책 몇 권 정도 사주면 된다.
본질을 향하니 아이들의 교육에도, 나의 삶의 방식에도 큰돈이 필요하지 않다. 다행이다.
5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이 시간 동안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긴긴 휴직기간 동안 그저 놀고먹으며 아이들만 바라보고 살았다면(초반 휴직기간엔 그랬다.) 지금과 같은 통찰의 시간은 없었으리라.
돈이 많을 때도 적을 때도 늘 유지했던 건, 새벽기상이다. 5시쯤 일어나 책을 읽고 생각하고 끄적이는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40 넘은 지금도 철이 들지 않았을 것 같다.
내년에는 기나긴 휴직 기간이 끝난다. 복직을 해야 한다. 아이들은 남편이 돌볼 예정이다. 우선은 그렇게 살아보다가 또 문제가 생기면 이것저것 조정하며 우리 가족만의 좋은 방식을 찾아가야겠다.
그리고,
여보 잊지 마.
여보가 복직한 지 3개월 만에 그만둘 때 내가 아무 말 없이 그만두라고 했던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