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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은 Dec 21. 2020

잃어버린 아이들


  10년도 더 된 일이다. 새내기 놀이치료사로 갓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보통 아이들이 놀잇감이 가득한 방에 들어가면 “우와~”하며 환호성을 치며 달려들거나 감탄사를 연발하기 마련인데, 그 날 만났던 아이는 지금까지 만나왔던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저 가만히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할 뿐, 상담사인 내 눈치만 슬금슬금 보고 있었다.

  상냥한 어투와 표정으로 다가가, “안녕, 나는 오늘 너와 함께 특별한 놀이를 할 ○○○야.”하고 소개를 했음에도, 아이는 난처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마치 내가 아이를 괴롭히고 있는 사람처럼 느끼듯이. 말 그대로 얼어버렸던 것이다.

  나도 초짜 상담사였기에 당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도 어색하고 민망한 시간이었지만, 먼저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에게 놀이실을 소개하고, 놀이실에서 어떤 놀이를 할 수 있고, 내가 다른 어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한껏 어필했다. 나 자신을 아이가 즐겁게 놀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애썼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아주 미세하게 놀잇감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를 보며, 그제야 눈치를 챘다.

  아! 놀이를 할 줄 모르는구나.


  연세 드신 어른들에게 최첨단 핸드폰을 쥐어주면 당황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쳐다만 보고 있는 것처럼. 이 아이에겐 놀잇감이 가득한 놀이실은 사용할 줄 모르는 최첨단 기기가 가득 있는 곳과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미지의 세계. 놀이를 모르는 아이에게 놀이치료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건 내가 배운 전공도서에 나와 있지 않았던 일이었다. 순간 엄청난 고민을 했다.

  무수히 많은 놀잇감 앞에서 벌벌 떠는 아이의 모습은 너무 괴로워 보였고, 불안해 보였다. 일단 아이를 안심시켜주고 이곳이 안전한 곳이고 강요가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놀이도 ‘해야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나는 천천히 아이에게 허락을 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기에 아이를 내 다리 위에 앉혔다. 포옹하듯 아이를 감싸서 토닥토닥하며 몸을 조금씩 흔들고 리듬에 맞춰 작게 이야기를 했다. 어린 시절 엄마나 할머니가 옛날이야기를 할 때처럼.

  아이는 처음에 어색해했지만 이내 안심을 하는 듯 보였고, 쑥스러운 듯 내게 조금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한참이 지나서 아이는 주~욱 놀이실을 둘러보더니 모래상자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모래에 손을 조금 집어놓고는 모래를 만지작만지작했다. 아이가 놀이와 첫 만남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다가가 그 경이로운 순간을 함께 했다.

  이때 아이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마치 잃어버렸던 말을 다시 해보기 위해 벙긋거리며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그동안 ‘놀이’라는 자신의 본능적인 언어를 잃어버린 채 살았던 것이다. 언어가 없으니 표현할 수 없었고, 표현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과 잘 지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잃어버린 언어, ‘놀이’를 찾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나는 아이가 ‘놀이’라는 언어를 회복하기까지 함께 했는데, 그 과정은 매우 경이롭고도 섬세하게 진행된 시간이었다.

  얼마 안 가서, 아이는 조금씩 나와 만나는 특별한 놀이시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놀이실이 자신을 테스트를 하는 공간이 아니라, 마음껏 시도해 볼 수 있는 재미난 실험장처럼 느끼는 듯 행동했다. 아이와 나는 그렇게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아~주 아~주 다양한 시도를 충분히 해봤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는 내게 새로운 놀이라며 자신이 만든 놀이를 알려주고 함께 하자고 제안까지 하는데, ‘오~ 마이 갓!’을 외칠 정도로 감격에 찬 순간이었다.




  위 사례 아이와의 만남이 10여 년도 더 된 일이지만, 제에겐 잊지 못할 일이기에 가장 먼저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놀이를 할 수 없는 아이가 있을 수 있다는 충격을 안겨준 일이기도 했지만, 제가 앞으로 어떤 상담사의 길을 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준 계기를 준 아이기도 했으니까요.

  사실 그때는 지금보다는 영어교육이라든가, 사교육이라던가, 영재 발굴이라던가 하는 것에 온 국민이 매달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진 어느 정도 아이에게 놀이가 보장되는 분위기였고, 나름 놀이터에도 아이들이 나와 노는 일이 꽤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선행학습은 있었으나, 누구나 하는 당연한 일은 아니었었고, 어느 특정 지역의 극성 부모에 국한된 이야기로 언급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놀이를 하지 못하는 아이를 만났을 때, 꽤나 충격이 컸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유치원 입학을 앞두고, 영어유치원을 보낼지 아니면 일반 유치원을 보낼지 고민하는 사람이 허다하고, 한글 떼기를 해야 하는 것처럼 파닉스를 떼야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는 세상이 되어버렸으니까요.

  학교 가기 전에 이 모든 것을 완수해야 하는 분위기가 되면서, 교육 연령은 점점 빨라졌고, 한참 자신의 주도성을 획득해야 하는 5세 때는 한글과 영어 학습지를 슬슬하기 시작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심리사회발달 단계 중 하나인 주도성을 획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학습이 아이들의 발달과업이 된 시대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저뿐만 아니라 아이들에 대한 걱정을 숨어서 조심스럽게 하는 분들이 알게 모르게 많을 거라 생각됩니다. ‘헬 조선’이라 부르며 청년들이 살기엔 척박하고 힘겨운 땅이라는 외침이, 20대들만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껏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더 고통 속에서 힘겹게 버티며 살고 있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부모들은 내 아이가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고, 무시당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잘 살았으면 좋겠고 등등 바람이 있을 겁니다. 저 역시도 두 아들을 키우는 부모이기에 그 마음이 어떤지 절절히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부모의 바람이 좋은 뜻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서, 그 과정과 결과가 무조건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부모들의 이러한 좋은 바람이 아이들의 권리인 놀이를 빼앗는데 당연한 이유가 되었고, 이제 막 말을 해서 발을 떼며 걷기 시작하는 아이에게 조기교육이나 선행학습을 하게끔 하는 추동력이 되었으니까요. 부모의 좋은 마음으로 출발점이라고 해서 무조건 지지할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결국 괴로운 건 아이들이고, 저항하지도 못한 채 순응하며 살아가는 건 우리 아이들이니까요.


  빅뱅이 일어난 지구에 생명이 생긴 그 순간부터 놀이가 시작되었던 것처럼. 원시시대 때 그린 동굴벽화에서도 채집과 의식주 관련 벽화를 제외하곤 모두 놀이를 나타낸 것들뿐이니. 놀이가 우리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뭐 거창하게 빅뱅까지 거론하지 않고서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일으니까요. 하물며 아무것도 모르는 동물들조차 태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바로 뒹굴며 노는 것이 전부인 걸 보면, 놀이는 모든 동물의 본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의식주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놀이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니 놀이를 빼앗고 있습니다. ‘쓸 때 없는 시간’이라는 오명을 쓰고 말이죠. 정말 그럴까요? 정말로 놀이는 쓸 때 없는 것일까요? 앞으로 이 부분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놀이가 우리 아이들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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