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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은 Dec 21. 2020

#1 잊혀진 ‘놀이’를 찾다

빼앗긴 아이들

 지루하리만치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길 간절히 바랬고, 어디 특별한 일 없나 하고 바랬던 지난날은 오히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마스크 없이는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게 만들었고, 길거리를 다닐 때조차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건 아닌지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생활이 되었으니까요.

  아이들은 마치 전쟁터를 가는 냥 마스크와 손 소독제를 무장해야만 집 밖에 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한번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녹록지만은 않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놀이터는 더 이상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곳이 아니게 됐고, 삼삼오오 모여서 웃고 떠드는 아이들의 소리는 더 이상 들이지 않은지 오래되었습니다.


  2027년 아이들이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아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암울한 미래 세계를 그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 영화의 한 장면처럼. 2020년 우리는 그 영화와 별다를 것 없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이죠.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아직 집집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이고, 형제간의 싸움 소리, 엄마의 잔소리와 불평하는 아이들 소리가 여전히 들린다는 것입니다. 소음 같던 싸움 소리가 이젠 삶이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로 들립니다.


  아이들과 하루 종일 함께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 역시도 두 아들의 엄마이기에 맘 속 절절히 느끼는 바입니다. 지금껏 불평만 했던 학교가 어찌나 고마운지, 코로나로 인해 바뀐 가장 큰 사고의 전환이 바로 학교에 대한 시선과 마음일 겁니다.

  익숙했고 당연했던 것들의 대한 재발견으로, 갑자기 감사할 것도 많아졌고(학교처럼), 버티고 싸워야 하는 것(아이들과의 시간처럼)도 많아졌습니다. 아이들은 또 어떻습니까? 마스크와 아크릴 가림막으로 무장한 채 친구들을 만나며, 잠깐의 조우로 목마름을 달래야 하는 학교생활에 차츰 적응하는 모습을 보면, 참 안쓰러운 마음뿐입니다.


  처음 한두 달은 금세 예전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는 이 시간이 계속 이어질까 봐 걱정했고,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서는 나름 적응도 했었습니다. 물론 새로운 삶보다는 이전의 삶을 훨씬 더 오랫동안 영위하며 살았던 부모들에겐 여전히 예전을 그리워하고, 회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겁니다. 그렇기에 더욱 견디지 못할 순간이 오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치기도 하는 것이고요.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원망으로 채워지고, 앞으로가 망막하고, 이제껏 관성처럼 살아온 방식에서 벗어나는 건 마치 죽음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지금껏 우리는 작은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을요. ‘내 아이’에게 집중하기보다는 무리에 있는 ‘우리 아이’가 어느 정도 인지를 보며 살지는 않았나요?

  일찍이 사교육 현장에 뛰어들어, ‘놀이’보다는 ‘학습 놀이’에 아이들을 끊임없이 노출시키며 선행의 행렬에 따라가진 않았나요? 무엇이 그토록 우리 부모를 불안하게 했는지조차 생각할 겨를 없이, 무리에 떠밀려가고 있진 않았는지. 우리에겐 지금 멈춰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 건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함께 멈출 수밖에 없는 이 시간은, 어쩌면 신이 내린 ‘stop’ 사인의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지금껏 불안해서 해보지 못했던 것을 ‘내 아이’와 함께 용기 내서 해보는 기회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껏 잃어버리고, 빼앗기고, 기회조차 없어서 시도하지 못했던 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다시 채우고, 회복하고, 찾아야 하는 건 또 무엇인지 말이죠.


  우리는 위대한 과학자처럼 용기 내어 ‘일단 해 볼 때’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성공으로 이끄는 글로벌 리더들의 신화이니까요. 우리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의 성공 일기인 ‘위인전’을 읽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 신화를 쓰도록 해 보는 겁니다.

  어떤가요, 준비되셨나요?



  지금껏 우리 아이들이 이미 갖고 있었지만 의식조차 못해서 이제껏 놓쳤던 파랑새(행복은 가까이 있었다는 행복의 새)처럼, 자신의 삶을 이끌고, 주도적으로 살 수 있는 재능을 회복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세워나갈 수 있으니까요. 뭐가 있을까요? 바로 ‘자기 결정권’입니다.

  작은 선택조차 타인에게 맡기며 스스로를 ‘선택 장애’라 말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잘 구비되어있는 시스템과 환경 속에서 주어진 일과 학습에만 맞춰서 성장한 아이들. 우리는 여태껏, 아이들에게 ‘수동적인 삶’을 살라고 강요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지금, ‘주도적인 자신의 삶’을 어떻게 찾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가만히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는 벌써 자신만의 고유 능력을 조금씩 되찾고 회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코로나가 갓 시작되었을 즈음 ‘아무 놀이 챌린지’라는 유튜브 영상이 뜨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집콕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이러한 유행을 탄생시켰다 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 역시 학교마저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일단 아무 놀이라도 시작해 보자’라는 심정으로 이 움직임에 동참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위기의 시간이 없었다면 과연 아이들의 놀이에 부모가 관심이나 가졌을까요? 오히려 경쟁적인 학습에 더 열을 올렸을지 모릅니다.

  많은 시간 아이들과 부대끼며 시간을 보내야만 하다 보니, 학습만으로는 그 많은 시간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어린아이일수록 집중하는 시간이 짧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고, 집중력을 늘리기 위해선 즐거움이 동반된 놀이가 최고라는 것을 체득하게 된 것이죠.

  놀이를 통한 ‘견디기’의 시간이 ‘주의집중’이라는 학습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과 함께 부모 자녀 관계의 회복 그리고 친밀한 신뢰관계와 의사소통까지 수월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몸소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놀이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부모들에게, ‘아무 놀이’는 오히려 부모의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는 역할을 해줬습니다.


  상담현장에서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은 바로 “선생님, 아이랑 놀이를 하려면 어떤 것을 해야 하나요?”였습니다.

  많은 부모님들은 놀이의 즐거움을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고, 어떻게 놀이를 시작해야 할지도 망막해져 버린 상태였으니까요. 그런데 아이와 함께 버텨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죠. 버티는 시간은 어떻게든 일단 시작하게 만드는 힘을 준 것입니다. 그것이 어쩌면 생존을 위한 몸부림과도 같았을 겁니다. 아이들과 함께 견뎌야만 하는 생존시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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