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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은 Jan 22. 2021

#7 겁먹지 말지어다

부모는 그냥 되는 줄 알았다

  1호가 5살, 2호가 3살 때였다. 전쟁의 서막이 열리듯, 1호에게 드디어 레고 선물이 들어왔다. 레고 세계에 아직 발을 들여놓기 전이라서 그런지 처음에는 감흥이 없었다. 아직 케이블 TV를 볼 때가 아니어서 그런지, 캐릭터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고, 마냥 선물이라는 것만으로 행복해했던 때였다. 그러나 레고 상자를 오픈하는 순간,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아직까지도 레고를 끼고 사니 새로운 세계라고 할 만하다).


  집집마다 아들이 있는 집이라면 책장 꼭대기에 레고 작품이 줄지어 서있는 광경을 보는 건, 익숙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그로 인한 형제싸움이 날마다 전쟁처럼 이루어지는 것도. 그러한 전쟁 같은 일상을 예방하기 위해, 나는 고민 중이었다. ‘저 레고가 필시 악의 근원이 되리라’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런 위기감도 생각도 없는 아빠는 아들들을 불러 모아서 이 레고가 얼마나 재밌는 건지 설명하며, 호기롭게 설명서를 펼쳤다. 그 모습을 보며 ‘한 치 앞도 못 보는 어리석은 자여!’라고 아내가 생각하리라곤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거다.


  열심히 레고의 볼록한 부분을 세어가며 1호에게 방법을 전수 중일 때, 2호가 등장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작은 조각들이 투명 봉지에 뭉텅이로 있는데 어찌 현혹되지 않으랴. 슬금슬금 다가가서 한 봉지를 낚아채서 달릴 때,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이건 형아 꺼야. 너 장난감은 따로 있으니까 이건 안돼.”라고 힘주어 말했지만, 3살이 그 얘기에 퍽이나 귀를 기울일 리 만무했다. 연신 채가는 봉지를 다시 찾아오기를 반복하다 드디어 1호가 “내! 꺼! 야!”하고 소리를 치는데, 우와~ 나도 깜짝 놀랐다. 우리 아들 성악해야겠는데?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그 후 1호의 놀랄만한 집중력으로 몇 시간도 안되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됐다. ‘어쩌지? 첫 순간이 중요한데...’라고 생각했던 나는 “우와~ 이거 사진 찍어야겠다. 멋있다. 이거 잘 찍어서 오래오래 보자.”하며 핸드폰으로 증거사진을 남겼고, 예상대로 아이는 부서지지 않게 높은 곳(정확히는 동생이 만질 수 없는 곳)에 전시 해두길 바랬다. 이때를 놓지면 안되겠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래, 그럼 언제까지 저기에 놓을까?”하고 묻자 아이는 ‘그런 건 생각도 안 해봤다는 얼굴’로 “음......”하고는 손가락을 3, 4개를 올리는 것이 아닌가(사실 아이가 손가락 3, 4개 올리는 것으로 표현하는 게 전부일 때라는 걸, 엄마인 나는 십분 이용했던 거다). 옳다구나, “그럼 (손가락으로 가장 크게 보이도록 4개를 올리고는), 네 밤 자고 다시 원래대로 내려놓기다~”라고 하자, 시간 개념이 많지 않은 아이는 엄마의 간교한 작전을 의심 없이 수용했다(아들아~ 미안하다).


  네 밤이 지난날, 나는 레고 작품을 꺼내서는 약속한 날이 되었음을 아이에게 상기시킨 후, 레고를 다 부수기로 했다. 아이가 처음에는 조금 망설였지만 “근데, 1호야, 우리 이걸로 집도 만들 수 있고, 비행기도 말들 수 있는데, 어때? 엄마랑 해볼까?”하자, 그런 것도 할 수 있냐는 듯 바로 엄마의 꼬임에 넘어갔다.


  아이는 점점 부수는 행위에 만족감을 드러내며 2호까지 불러서 부수는데 열중하더니. 나중에는 인심 쓰듯 “형아가 집 만들어줄께.”하며 새로운 제안도 하는 게 아닌가. 그때 알았다. 앞으로 레고로 인해 싸움이 잦진 않겠구나.


  동생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하고 엄마가 옆에서 양념처럼 호들갑을 같이 떨어주자, 1호는 그 분위기에 취해 원래 작품보다는 자신의 새로운 아이디어 작품이 훨씬 더 환호받는다는 경험을 하게 된 거였다. 그러니 자신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1도 들어가지 않은 레고 설명서보다는 허술해도 자신의 아이디어로 만든 창작물이 더 가치 있게 느껴지는 건 당연했을 거다.


  그 뒤로 1호는 레고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레고는 그저 하나의 ‘재료’ 쯤으로 대하게 된 것이다. 1호는 레고를 트로피처럼 대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재료로서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레고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이후 레고로 자판기도 만들고(신기했다. 동전을 넣어서 진짜로 또 다른 레고 블록이 나오는 자판기 형태를 만들어 내다니), 핀볼 게임도 만들고 총도 만들더니, 급기야 이제는 레고를 고를 때 내용물의 블록 종류를 살피며 부품으로 사용할 걸 고르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뭐 이건 또 다른 슬픈 이야기로 이어지지만, 그건 차츰 나중에 이야기하는 걸로 하고.


  여하튼 그 이후로 새로운 레고 선물을 받으면 제일 먼저 설명서대로 해본 후 바로 부시고 동생이랑 새로운 걸 만드는데 더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는 거다. 동화의 마지막 해피엔딩처럼. 지레 겁먹고 상황을 살피던 그때의 내가 우스울 정도로 말이다.


  아이들은 어떻게 그 상황을 경험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른 상황으로 이끌어 간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부모인 나는 그저 그 상황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풀어나갈지 지켜보며 적절하게 거들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는 것을.


  만약 내가 섣불리 레고 전쟁을 예측하고 1호에게 동생이랑 나눠 써야 된다며 ‘옳음’에 대해 가르치기만 했다면, 아이는 레고로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려 들었을 거다. 아이는 ‘내 건데 왜 동생이랑 나눠 써야 하는지?’하고 납득되지 않는 상황에 계속 반문했을 거다. 게다가 부모의 ‘사이좋게’라는 것이 결코 좋게 들리지 않게 자신에게 부당한 처우로만 느껴졌을 거다. 마치 ‘너네는 형제니까 사이좋게 지내야 해’하고 강요하듯이.


  이 얼마나 부조리한가. 옳음의 탈을 쓴 강요라니. 부모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나 스스로도 하지 못할 성인군자가 되라고 아이에게 강요하고 있는 게 아닌지,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된다.


  어쩌면 아이가 이 상황을 잘못 인식해서 ‘엄마 아빠가 동생을 더 사랑하니까 내 껄 자꾸 나눠 쓰라고 하는 거’라고 오해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애들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냐고 묻는다면, 아이들은 7세 이전까지는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부모가 싸우기만 해도 ‘내가 엄마 말을 안 듣는 나쁜 아이여서 엄마 아빠가 싸우는 거야. 내가 나빠.’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시기 아이들에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이다. 7세까지 아이들의 인지는 아직 역지사지를 할 정도로 발달하지 못했을 때다(아이들의 인지발달에 관해서 굳이 여기에서 논할 것까지 없으니 생략하겠다).


  이 경험을 통해 한 가지 확실하게 느낀 건, 섣불리 부모가 개입을 해서는 안된다는 거였다. 나의 예측이 틀릴 수도 있으니까.


  아이들은 스스로 경험하며 세계를 넓히고, 자신의 세계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세계를 연결하게 된다. 어찌 보면, 우리보다 훨씬 더 현명한 방법과 대안을 가슴에 품고 있을지 모른다. 부모인 우리가 할 것은 방해하지 않고, 그 긴장된 순간, 아슬아슬한 순간을 함께하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싶다.


  부모가 가진 가장 큰 오류는 아이들을 ‘가르치려 한다’는 거다. 모든 문제는 거기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오랜 시간 상담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면서 느낀 건, 부모 혹은 어른이 아이들의 세계와 경험을 꽤 많이 방해하고 있다는 거다. 그것도 ‘걱정’이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과 타인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여기에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과 ‘성장에 필요한 것을 포함한 건강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곤, 개입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어날지 아닐지 알 수 없는 걱정으로 인해 아이의 성장과 건강을 얼마나 많이 방해하고 있는지, 부모인 나도 때때로 반성하게 될 때가 많다. ‘~할까 봐’, ‘~하면 어떻게 해’, ‘나중에 ~할지도 몰라’ 등으로 말이다. 이런 부모의 앞선 걱정이 아이에겐 간섭으로 느껴지게 만들고 아이의 창의성과 능력을 짓밟는 행위라는 것. 그걸 조심해야 한다.


  유치원에 가면 꼭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발달이 빠른 친구가 발달이 더딘 친구에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덥석 달려들어서 그 친구의 과제를 해치워버리는 일. 그래서 발달이 더딘 친구는 울면서 “쟤가 내 껄 뺏어갔어.”하고 울고, 발달이 빠른 친구는 “내가 도와줬는데.”하며 억울해하는 일처럼, 부모가 마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여기는 교만과 오만함을 아이에게 행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날마다 아이를 보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의 섣부름이 아이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건 아닌지. 어쩌면 가장 큰 방해꾼은 부모인 내가 아닌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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