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일탈의 하루였다. 버거킹에서 햄버거 두 개를 먹고, 노래방과 PC방까지. 성인이 된 이후로 해본 적 없는 게임을 하려다 주민등록증 검사를 마주치고 도망치듯 나왔다. 새벽 세 시에 잠들고 아침 아홉 시에 일어났다. 도파민은 더 이상 터지지 않았고, 온몸이 축 늘어졌다.
카페에 앉아 묵상집을 펼쳤다.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소비적 쾌락에 빠졌음을 회개하며, 고요히 조명했다.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가. 무엇에 물들고 있었는가.
『사색이 자본이다』를 펼쳤다. 첫 인상은 여느 자기계발서와 다르지 않았다. 목적독서를 선언했지만 작가의 서술 방식에 실망했고, 심지어 동훈 형에게 "이딴 걸 위해 5년을 고민한 게 맞냐"는 투의 말을 해버렸다. 그런데 그가 한마디 던졌다. "그럴 거면 대중철학에서 '대중'이라는 단어는 빼."
그 말에 긁혔다. 다시 책을 펼쳤다. 나는 아직 '낙타'조차 되지 못한 채, '사자'인 줄 아는 교만함 속에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인간의 정신을 세 단계로 설명했다. 낙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 나는 그 단계를 오르기도 전에 사자의 포효만 흉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다시 읽었다. 좋은 대중서는, 한 가지 주제를 주장하기 위해 300페이지를 할애한다는 진실을 떠올렸다. 페이지마다 나를 흔드는 문장이 있었다. 어떤 문장은 나를 대중철학자로 부르고, 또 어떤 문장은 내 불안을 건드렸다. LLM이 더 나은 편집자가 되리라는 예감, 내 연구가 AI에게 대체될 수 있다는 두려움. 그러나 나는 이제 그런 불안에 발목 잡히지 않기로 했다. 생각이 스스로 끊기도록 훈련하고 있다.
the better 단톡방에 질문을 올렸다. "AI 시대에 인간이 여전히 훈련해야 할 영역은 무엇인가?" 아무도 나의 답—편집학적 소양—에 명확히 호응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박식했지만, 개념을 귀납적으로 발전시키는 토론은 이끌지 못했다. 나는 진짜 토론이란 무엇인가, 깊이 있는 대화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했다.
지하철에서 나는 책을 양손으로 꼭 쥐고 읽었다. 마치 저 깊은 어둠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난간을 붙잡은 사람처럼. 이론을 붙들지 않으면,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인간은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LLM처럼 정보를 편집하고 융합할 수 있는 존재로 진화해야 한다. 우리는 정보습득, 편집 훈련, 판단력 훈련이라는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 중심에 편집학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편집학을 공부하기로, 또 대중에게 건네기로 결심했다.
요즘 나는 꿈속에 산다. 현실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내 이론, 나만의 사유 체계를 완성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다. 누군가 나에게 10억을 투자해줘서 이론만 파고들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도 해본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자의 자세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통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나는 노동과 고통 속에서 이론을 정련하는 방식을 믿는다.
그리고 이제 나는 점을 더 크게 찍으려 한다. 이 점은 너무 커서, 선과 면보다 클 것이다. 그 점은 나의 철학이자, 나의 사유이며, 앞으로의 삶 전체를 끌어당기는 힘이 될 것이다. 나는 왜 이걸 하는가? 글쎄, 이유는 단 하나.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 재미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김정운 교수가 말한 바로 그 ‘재미’, 머리 좋은 사람도 흉내 낼 수 없는 몰입의 즐거움. 나는 그것에 푹 빠져 있다.
철저한 이기주의를 가장한 자기희생의 철학적 미덕
나는 점을 더 크게 찍는다.
그 점이 현실을 이끄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