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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osophers needlework Oct 20. 2024

상처

- 어떤 상처는 알아주기만 해도 낫는다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탔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일처럼 기뻐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한 것을 뉴스에서 잠깐 보았다. 나도 내 일처럼 기뻐했는데 “소년이 온다”에서 풀어낸  5·18 민주화운동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상황과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실에 아주 가깝게 그렸다. 한강은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매우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너무나 힘이 들었지만 써야만 했다고. 그 시절 그곳에 있던 사람으로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으면서 이렇게 같이 아파해 주니 고마웠다.


 전쟁은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럼에도 개인은 가장 크게 피해를 입는다. 엄마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겪으며 살아오셨다. 가끔 그 시절 이야기를 하셨다. 일본어를 강제로 배워야 했던 것, 그 이유로 외할아버지가 학교에 못 다니게 해서 학교에 가는 옆집 친구를 담장 너머로 쳐다보면서 부러워 울던 기억, 공출한다고 논에서 벼 이삭 개수를 세던 일본인들을 보며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일 들을 말해주셨다. 


 나는 전쟁을 직접 겪은 적이 없다. 다만 전쟁이란 이런 것일까 하고 느껴 본 적은 있다. 1980년 5월에 일어났던 사건을 두고 엄마는 당신이 겪었던 두 번의 전쟁보다 더 무서웠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 중학교 2학년이었다. 갑자기 학교에 가지 말라고 해서 우선은 좋았다. 매일 해야 하는 수학 숙제가 있었는데 그것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무척 좋았다. 5월 17일이 석가탄신일이어서 쉬는 날이었다. 장에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신 엄마가 난리가 났다고 하셨다.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젊은이들 무리가 ‘물러가라, 타도’ 이런 말들을 확성기에 대고 떠들던 소리가 시끄러웠는데 그것과 상관있는 일인 듯싶었다. 결국 계엄이 선포되어 비상시국이 되었다.


 그날부터 엄마는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녹두죽, 팥죽, 콩죽, 콩나물죽 등 여러 곡식과 채소를 넣어 끓인 죽은 맛있었다. 나중에는 김치죽까지 먹었다. 엄마는 사태가 길어질 것에 대비하여 식량을 아끼고자 지혜를 발휘하셨다. 그 어려운 시간들 속에서도 나는 다양한 죽을 맛보며 별미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로 도시가 봉쇄되어 생활물자 조달이 어려워서 생긴 일이었다. 엄마는 라면 한 박스를 웃돈을 주고 사기도 하셨다. 자식들 굶길 일이 큰 걱정이셨던가 보았다. 


 밖에서 총소리 같은 것이 나기도 했다. 총소리라고는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듣던 것밖에 없었으니 그 소리가 정말 총소리인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가끔 매캐한 냄새가 나서 재채기가 났고 피부가 따끔거렸다. 밤이면 도시 외곽이 벌겋게 불이 난 것도 같았다. 옥상에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총 맞아 죽는다고 못 올라가게 해서 답답했다. 총소리가 심한 밤이면 솜이불을 여러 겹 두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웅크리고 있었다. 어느 집 안방 장롱 문짝에 총알이 날아와 박혔다는 소문이 돌아서였다.

 

 방송국이 불타 텔레비전이 안 나오고 라디오도 못 듣고 신문도 배달이 안 되어 심심해진 나는 드디어 수학 숙제를 할 지경이 되었다. 밀린 것을 하고 다음 한 달 치를 미리 다 했어도 학교에 가라고를 안 하였다. 춘추복을 입다 6월이 되었으니 하복을 입고 가야 하나 어째야 하나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하며 집에서 지냈다. 시큰둥하던 학교마저 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전화가 끊어져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오빠와는 연락이 안 되었다. 나중에 들으니 가족들 안부가 걱정된 오빠는 버스를 타다가 걷다가 시 경계에까지 왔으나 검문에 통과 못 하고 돌아갔다고 했다. 공수부대가 대학생은 팔을 잘라내어 그 피로 벽에 글씨를 쓰고 무조건 죽인다, 특히 여대생은 가슴을 도려내어 죽인다 이런 무시무시한 소문이 돌았다. 여러 유언비어가 돌아 나날이 더 무서워졌다.


 드디어 학교에 가게 되었지만 길에서 군인들을 보면 깜짝깜짝 놀랐다. 청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아도 혹시 시체를 치우고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 무서웠다. 자다가 가위에 눌렸다. 학교에 갔더니 옆 반 학생이 죽었는데 시위 구경 나갔다가 총에 맞았다고 했다. 교실에 빈자리가 보이면 누가 죽었나 이런 생각부터 들었다. 그 후로도 한동안 군복만 보아도 공수부대가 떠올라 무서웠다. 대학에 가서는 그 무서움이 불쾌함으로 분노로 무력함으로 바뀌었다. 


 1980년 5월 당시 비록 우리 가족은 약간의 굶주림과 지루함, 불안함을 겪었던 것 외에 누가 죽거나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막막했던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 같은 것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어떤 상처는 알아주기만 해도 낫는 경우가 있다. 이제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해 줄 것이므로 매우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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