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로소픽 Jun 14. 2018

트럼프의 당선과 미국 진보의 위기

[출간 후 연재] #1.《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다. 트럼프가 거둔 놀라운 승리는 마침내 미국 진보주의자들과 급진진보주의자들을 활기차게 만들었다. 그들은 트럼프가 대변하는 모든 것에 대한 자칭 '저항'을 조직하느라 바쁘다. 

 

제45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 출처: Pixabay


관계망을 형성하고, 행진하고, 타운홀미팅(정책결정권자나 선거입후보자가 유권자들에게 정책을 설명하고 토론하는 비공식 공개회의—옮긴이)에 참석하고, 의원들의 전화기를 뜨겁게 달군다. 중간선거에서 상하원 의석들을 되찾고, 3년 뒤엔 대권을 재탈환하자는 이야기가 활기차게 오간다. 이미 후보자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틀림없이 일부 보좌진은 백악관 웨스트 윙의 집무실을 차지할 날을 벌써부터 꿈꾸고 있을 것이다. 

미국 정치가 그렇게 단순하다면야 얼마나 편하겠는가. 정권 잡기 게임의 승자와 패자. 우리 진보주의자들은 과거에 이 게임을 했고 때로는 이기기도 했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승리한 이후 대통령 임기 10회 가운데 4회는 민주당 대통령들이 역임했으며,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가 재임한 기간에는 의미 있는 정책적 승리들도 있었다. 그러나 고유한 역사적 리듬을 따르는 듯한 대통령 선거는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 표면 아래로 내려가면 상황은 몹시 암울해진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말이다. 

클린턴과 오바마의 좌절

클린턴과 오바마는 희망과 변화로 가득 찬 메시지로 당선되고 재선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만만한 공화당 의원들, 우파 성향의 대법원, 꾸준히 늘어나는 공화당 주 정부들의 방해로 거의 모든 사안에서 좌절했다.  

클린턴과 오바마의 대통령 선거 승리는 미국 여론의 우경화를 멈추기는커녕 늦추는 역할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주로 뻔뻔스럽고 영향력이 대단한 우익 미디어 복합체들 때문에, 그들의 재임이 길어질수록, 정치적 원칙으로서의 진보주의를 경멸하는 대중이 더 늘어났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극우 대중영합적 웹사이트들이 절반의 진실과 거짓말, 음모론, 날조를 뒤섞어 제조한 독성 음료를 귀가 얇은 사람들, 분노에 찬 사람들, 위협적인 사람들이 게걸스럽게 들이켜는 광경을 본다.  


제42대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좌)과 제44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우) - 출처: Pixabay


진보주의자들은 자칭 무당파와 보수주의자에 밀려 미국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3위 당파로 처졌다. 심지어 젊은 유권자들과 일부 소수자 집단들에서도 그러하다. 우리를 거부하는 목소리들은 매우 분명하다. 솔직히 도널드 트럼프 개인은 우리의 걱정거리 가운데 가장 사소한 부분이다. 우리가 트럼프 너머를 내다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거의 없다.

위기에 직면한 미국 진보주의

미국 진보주의는 21세기에 위기를 맞았다. 그 위기는 우리 편에서는 상상력과 야망의 위기, 더 광범위한 대중의 편에서는 애착과 신뢰의 위기다. 미국인의 과반수는 우리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전달해온 그 어떤 거창한 메시지에도 더는 호응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충분히 명확하게 밝혔다. 심지어 우리 후보에게 투표하는 사람들도 우리가 (특히 그들에 대해서) 발언하고 글을 쓰는 방식에, 우리가 정치적 운동을 하는 방식에, 우리가 정권을 운용하는 방식에 점점 더 강한 반감을 품는다. 

다시 한번 에이브러햄 링컨의 명언을 상기할 필요가 절실하다. 


대중의 감정이 전부다. 대중의 감정을 얻으면, 결코 실패할 수 없다. 대중의 감정을 거스르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누구든지 대중의 감정을 주무른다면 법규를 제정하는 사람이나 판결을 내리는 사람보다 더 깊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제16대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 출처: Pixabay


미국 우파는 이 같은 민주 정치의 기본 법칙을 뼛속 깊이 이해한다. 이것이 우파가 두 세대 동안 이 나라의 정치적 의제를 사실상 통제해온 이유다. 진보주의자들은 그 두 세대 동안 이를 인정하기를 거부해왔다. 필경사 바틀비처럼, 그들은 "하지 않기를 선호한다." 

왜 그럴까? 위대한 미국 민중을 대변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그 민중의 감정을 일으키고 신뢰를 얻는 일에 왜 이토록 무관심할까? 이것이 내가 탐구하고자 하는 질문이다.


※ 출처: 마크 릴라 저,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필로소픽, 2018.06.10.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적인 정치철학자가 진보 진영에 던지는 메시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