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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소픽 Aug 13. 2018

"문재인 재기해" 도 넘는 페미니즘 정체성 정치

남성혐오적 페미니즘 정체성 정치, 진보의 필터링이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불고 있는 페미니즘 열풍이 심상치 않습니다. 서점가에는 《82년생 김지영》,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나쁜 페미니스트》 등 페미니즘을 소재로 한 책들이 줄기차게 쏟아져 나오고 있고, 정치권에서조차 페미니즘을 선거 슬로건으로 내세운 정치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들의 권위와 억압 아래 눌린 채 살아왔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다 함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홍대 누드모델 몰카 촬영 사건 당시 경찰이 편파수사를 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이 혜화역에서 벌인 규탄 시위에는 주최 측 추산 7만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날 시위에서는 남성 혐오적 표현이 빗발쳤습니다.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은 한국 남성을 벌레에 빗대 '한남충'이라 부르며 '재기'하라고 외쳤습니다. '재기해'라는 구호는 2013년 서울 마포대교에 투신해 숨진 故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의 죽음을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했던 문재인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날 시위에서는 "문재인 재기해"라며 문 대통령에게 투신자살할 것을 종용하는 충격적인 퍼포먼스마저 벌어졌습니다.


지난 9일 서울 혜화역 근처에서 열린 '불법 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 현장


문제는 일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조차도 이러한 극단적 페미니즘을 필터링 없이 수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혜화역 시위 직후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시위에 다녀온 사실을 밝혀 논란이 일었습니다. 대통령에게 죽으라고 조롱하는 시위 현장에 국무위원이 참여한 것은 매우 부적절한 처신이었다는 비판이 뒤따랐는데요, 그러나 이미 진보정당을 위시한 정치인들 다수가 페미니즘의 물결에 동참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자신들의 슬로건으로 활용한 지 오래입니다.


극단적 페미니즘을 내세운 정체성 정치

이처럼 극단적 페미니즘이 진보정치의 탈을 뒤집어쓰고 횡행하는 사태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의 저자 오세라비 씨는 "현재 우리 사회를 휩쓰는 페미니즘은 '분리주의적 페미니즘'임이 명확해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는 "이러한 극단적 페미니즘을 내세운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진보정치 속으로 들어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페미니즘은 우파도 좌파도 아니다. 엄밀히 말해 페미니즘은 정체성 정치 운동이다. 당파성을 띠거나 정치적 이념이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의 위상과 이익을 위한 정치적 실천운동이다. (…중략…) 현대 급진적 페미니즘이 성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빈곤의 덫에 갇힌 여성들의 삶은 이들 눈에서 사라져버렸다. 페미니즘이 대다수 여성의 삶과도 동떨어졌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페미니즘인가? -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p.77


그는 또 "정체성 정치의 만연은 보편적 인권과 광범위한 시민의 공통적인 비전을 밀어내 버린다는 점에서 우려할 수밖에 없다"며 정체성 정치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난 8월 9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페미니즘 정체성 정치를 비판한 오세라비 씨 (우)


일찌감치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지적한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정체성 정치'란 어떤 개념일까요.

미국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마크 릴라(Mark Lilla)는 정체성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한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에서 미국 대선 당시 힐러리가 트럼프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정체성 정치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미국 민주당이 성소수자(LGBT), 페미니즘, 인종주의 등 소수 의제와 운동성 정치에만 집중하는 정체성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힐러리의 패배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특정 이념 세력의 정체성을 대변하기에 급급해 국가적 수준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결과,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게 되었다는 게 마크 릴라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따라서 그는 진보정치가 전진하기 위해서 진보의 전통적 가치(연대·공동체·공적 의무)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정 세력의 정체성보다는 다수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공통의 비전 제시와 설득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보주의자들은 배경을 불문하고 모든 미국인이 실제로 공유한 바에 기초를 두고 
우리의 공통 미래에 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실제로 공유한 그것은 시민의 지위citizenship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시민에게 말하고 우리의—특정 집단들에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한—주장들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원칙들의 틀 안에서 펼치는 법을 재학습해야 한다. 
우리의 진보주의는 시민적 진보주의가 되어야 한다.


실제로 워마드와 같은 남성혐오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각종 남성혐오 현상으로 인해 남성들 사이에서도 페미니즘과 그를 정치적 슬로건으로 활용하는 진보정당에 대한 반발심이 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늘날의 극단적 페미니즘이 '남녀분리주의'를 강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들려옵니다. 정체성 정치가 진보정치의 실패를 불러왔다는 마크 릴라의 진단을 오늘의 우리가 되새겨봐야 하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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