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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Jan 18. 2020

지혜의 길과 믿음의 길

마음의 여정, 탐구의 여정을 끝내는 두 가지 길

- 지혜의 길과 믿음의 길
앎이 곧 믿음이고, 믿음이 곧 앎이다.


마음의 여정, 탐구의 여정을 끝내는 길에는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하나는 '믿음의 길'이다.

지혜의 길의 대표 주자는 불교 같은 종교이고, 믿음의 길의 대표 주자는 기독교 같은 종교이다.

제대로 끝까지 가면 과정이 다를 뿐 도달하는 곳은 같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제대로' 가는 게 핵심이다. 그렇지 않으면 중간중간 멈추어 혼돈 속에 있게 될 뿐이다. 많은 경우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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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길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지혜란 끝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함에도 마치 지혜 그 자체가 답인 듯 오해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를 넘어서는 지혜'가 아닌 '여전히 지혜 속에 갇히는 지혜'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물론 지혜는 유용성이 있으므로 얼마든지 잘 만들고, 잘 사용하면 된다. 그런데 그 유용성은 다만 유용성일 뿐인데 그것을 절대성 혹은 사실성으로 착각하게 되면서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실체가 있다, 자성이 있다'고 여기는 '근본 무지, 근본 무명'으로 표현해 경계시킨다.

지혜의 길에서는, 지혜 즉 앎에 대한 탐구와 별도로 결국 '지혜 그 자체' 그리고 '지혜의 주체인 나'라는 마지막 앎의 정체를 눈치채는 게 핵심이다. 보통 이 두 가지는 자기와 동일시되어 보면서도 보지 못지 못하게 된다.('나'도 다만 또 하나의 앎임을)

더하여 눈치채야 할 것은, 동양 사상을 예로 들면 만물이 무극에서 태극, 음양, 사상, 팔괘 식으로 무한으로 펼쳐지지만 결국 그 시작은 단 하나의 현상인 '만들어진 분별'일뿐임을 눈치채는 것. 그리고 애초의 무극과, 그 후의 태극과 음양, 사상, 팔괘 등이 결국 '같은 현상, 같은 놈'임을 깨우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에서 시작되고,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자, 그럼 '그 하나'는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로 돌아갈까? 이 질문을 '어디서 시작된다. 어디로 돌아간다'는 답을 요구하는 질문을 아님을 눈치채라. 저 질문 자체가 마지막 깨침에 대한 자극이다. 여기서 앎(지혜)으로서의 답이 아닌 실제 깨우침이 일어나면, 탐구의 여정은 끝나는 것이다)

시초의 '있음'과 그 직후의 '내가 있음'과 그 후의 모든 '부가된 있음'이 같은 놈들임을. '나'라는 것이 뭔 특별한 놈이 아니라 다만 눈 앞의 '볼펜'이나 '컵'과 하나 다를 바 없는 것임을.(그래서 '참볼펜, 참컵' 등이 없듯이 '참나' 같은 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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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길에서는, 믿음 역시 끝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데 마치 믿음(과 그 내용) 자체가 본래의 목적, 궁극의 목적인 듯이 오해하면서 길을 잃게 된다. 믿음을 이용하되 믿음이라는 것 자체의 정체 혹은 본질을 눈치채야 하는데 믿음에 의존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믿음의 주인이 믿음의 종이 되는 것이다.(실은 그 '주인'마저도 하나의 믿음에 불과함을!)

믿음의 길은 지혜의 길에 비교해 큰 마지막 문턱이 하나 있는데, 바로 '믿는 자 본인'과 '믿음의 대상인 신'이 끝끝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존재한다'는 믿음 자체가 탐구의 궁극의 대상이고 넘어서고 끝내야 할 대상인데, 믿음의 길은 이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마지막 문턱이 있게 된다. 


이 문턱을 넘어서는 마지막 순간이 결국 지혜(앎)의 길의 마지막 순간과 같게 된다. 물론 이것은 말과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실제 그 깨우침이 일어나야만 넘어서게 되는 자리이다.


믿음의 길의 유용성은, 다른 모든 잡다한 앎의 길의 내용들을 '믿음' 하나로 다 쳐낼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면서 또한 마지막에는 그 의존했던 믿음마저도 쳐내어져야 하는데 어려움이 있게 되는 것이다. 장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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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앎)의 길이니, 믿음의 길이니 구분을 했지만 결국엔 앎이 곧 믿음이고, 믿음이 곧 앎이다. 둘은 그 이름이 다를 뿐 사실 같은 것이다. 이것을 돌이켜지지 않을 선명함으로 깨우치는 것이 또한 탐구의 마지막 순간이기도 하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인류가 이 마음의 여정, 탐구의 여정을 끝내는 것이 존재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이다. 고타마 붓다가 '독화살의 비유'로 설명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 이와 별도로 각자의 존재성과 각자의 삶의 여정은 자유롭게 알아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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