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기 전에 아래 링크된 기사를 먼저 보자.
무척 아름다운 이야기다.
길에서 만나 친구...유기견과 함께 한 트레킹
2015년 9월, 국내 한 방송사 뉴스 사이트에 감동어린 해외 기사가 하나 있었다. 제목은 ‘길에서 만나 친구. 유기견과 함께 한 트레킹’. 2014년 11월, 에콰도르에서 열린 ‘모험 경주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스웨덴 4인조팀의 이야기였다.
"해당 대회는 내면 트래킹, 산악 자전거, 카약 등 극한 스포츠를 하면 10일간 총 700여km를 여행해 누가 빨리 완주하는지를 겨루는 대회이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이 대회를 위해 팀은 모든 걸 바쳐 연습했다. 그런데 경기 중에 길에서 앙상하게 마른 개를 한 마리 만난다. 스웨덴 팀은 그를 외면하지 못하고 미트볼을 건네줬다. 그런데 그게 고마웠는지 그 개는 그 뒤부터 팀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고된 산행, 진흙탕. 팀은 개의 안전이 걱정되어 그를 떼어내려 했지만 결코 떠나지 않았다. 결국 57km의 험난한 강을 카약으로 건너는 코스에서 팀은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런데, 배가 떠나는 걸 보고 머뭇거리던 개가 갑자기 강에 뛰어들었다. 결국 개를 카약에 태웠다. 이때부터 팀은 그 친구와의 만남이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경기 속도를 늦추었고 결국 12위로 경기를 완주했다. 그들은 지난 1년의 고된 훈련이 있었고 대회에서의 성과도 중요했지만 상을 타는 대신 소중한 친구를 얻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개는 함께 스웨덴으로 돌아가 팀원 중 한 명의 집에서 가족으로 함께 살고 있다.용맹한 고대 영국의 왕이었던 ‘아서’라는 이름으로.”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언어의 본질은 그 뜻(내용)에 있지 않고 그 활용에 있다.
이제 우리는 그의 말을 받아 다음과 같이 확장해서 선언할 수 있다.
삶의 본질은 그 내용에 있지 않고 그 활용에 있다.
1년을 준비한 모험 경주 세계 선구권 대회. '내용'을 우선으로 한다면 애써서 준비한 만큼 최선을 다하고 가장 좋은 성적을 내어야 한다. 우승까지. 보통은 그게 상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웨덴 팀에게는 고정된 '내용'들 즉 우승, 좋은 성적 등이 대회 참가의 본질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웨덴 팀에게만이 아니라 사실은 이 대회 그리고 모든 참가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대회의 본질’은 우승이나 좋은 성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대회를 통해 무엇을 경험하느냐, 이 대회가 어디에 활용되느냐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확장하여,
우리의 삶도 그리고 우리의 존재성도 그러하다.
우리는 삶이 혹은 내가 ‘뭔가 정해진 내용으로 채워야만’ 의미가 있다고, 완성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의미 있다 여겨지는 삶의 내용, 나의 내용은 도대체 누가 정하는가? 절대적으로 정해진 답이 있는가?
없다!
감히 누가 정하는가?
타인 따위들이? 세상 따위가?
아무도 정하지 못한다.
편의상 정하긴 하지만 이용할 뿐
결코 그것으로 한정되진 않는다.
심지어 '나'에 의해서조차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 의식적, 사회 문화적으로 정해진 숱한 ‘내용’들은 어느덧 종교보다도 더 강한 믿음이 되어 우리를 가둔다. 사실은 우리 자신이 가두는 것이다. 그것을 만든 주인이 스스로 그에 갇힌다.
무엇을 이루고 이루지 못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되지 못하고 등은 단지 '내용'일 뿐이다. 그리고 삶의 본질은 그 내용에 있지 않다. 내용은 단지 삶의 활용에 대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유일한 그리고 절대적인 게 아니다. 우린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다 해 보기도 하고 도 이우어 보기도 할 것이지만, 그 모든 내용은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이다.
물론 살아가고 존재하다 보면 자연히 내용은 만들어지고 쌓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삶과 존재에 '그것만이 의미가 있다'고 정해진 내용 따위는 없다. 만들어지긴 하되, 경험한 후엔 그리고 만든 후엔 그냥 흘려보낼 뿐이다. 그 선택은 다른 누가 아닌 내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성이다.
어떠한 내용도 만들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 내용에도 사로잡히지 않기.
내용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기.
내용이 단지 내용일 뿐임을 알기.
나는 그 내용에 개의치 않기.
그리고 삶을 활용하기.
그리고
심지어 '나'도 그 내용이므로
만약 할 수 있다면
‘나’마저도 잘 사용하여
삶에서의 활용에 집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