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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Jul 14. 2016

타인 없는 자기는 병증의 자기이다

'혼자만의 자기'는 불가능한 환상이다

'나'라는 인식은 '주체 설정' 행위의 결과이다. 즉 실제 '나'라는 것이 있고 없고와 상관없이, 인간은 어느 정도 이상 인식 기능이 발달하면서부터 모든 느낌, 반응, 생각, 행위의 주체로서 '나'라고 하는 것을 설정하게 된다. 즉 '자기'를 설정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기 시작하는 것이다.(동물들도 이 인식이 있겠지만 아주 흐릿하거나 인간만큼 선명 혹은 강박적이진 않다고 볼 수 있다)


불교 등에서는 이러한 '주체 설정'과 그 결과로써의 '나'의 문제에 있어, 이 설정과 그것을 절대시하고 전부시하면서 그리고 그에 대한 집착이 과도하게 되면서 인간의 거의 모든 번뇌와 고통, 다툼과 분노, 무지 등이 발생한다고도 분석해서 그 해결 과정의 하나로 '무아'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아'든 '무아'든 둘 다 정답은 아니다. 절대적으로 무엇이 옳다 그르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아냐 무아냐를 따지는 것은 마치 '토끼의 뿔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처럼 애초에 본질적으로 없던 무엇을 임의적으로 설정한 후에 그 여부를 따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불교의 중관 사상이 이를 선명하게 가르치는 경우이다)


이것은 유아냐 무아냐의 문제만이 아니다. 인간이 설정하는 모든 언어적, 비언어적 개념 즉 앎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를 중심으로 하는 유아, 무아론은 이미 허상인 '나'를 전제로 하는 한계가 있다. 사실은  나'라는 설정이 특별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인간이 제일 많이 접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대상이 '나'이기 때문에 그 익숙함, 집중성, 편리성 때문에 이용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나' 즉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설정, 개념, 앎이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타인 없는 자기(의식)는 병증의 자기(의식)이다'는 주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이것은 물론 '자기'라는 설정을 전제로 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애초에 타인과 자기라는 이 설정들이, 절대적이지 않으며 가변적이고 임의적인 것일 뿐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유용성, 효용성 등은 분명 존재한다. 인간의 모든 설정은 그 상대성, 절대성과 상관없이 유용성과 효용성이 있기 때문에 나름 의의가 있는 것이다. 설정이라고 해서, 상대적인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무의미하다거나 무용한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나 혹은 자기'라는 것은 기실 '너 혹은 타인'이라는 설정과 쌍생성, 쌍소멸되는 개념이자 설정이다. 즉 하나만 존재할 수가 없다. 마치 자석의 N, S극, 전기의 +, - 극처럼 그렇게 존재한다. 극성은 명백히 다르지만 사실은 같은 한 덩어리 현상이다. 즉 '주체 설정'이라는 한 설정 안에 담긴 두 극성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 사회를 보면(물론 다른 사회들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마치 '자기'가 혼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고 믿는 경우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소위 사회적 기득층일수록 그런 경향성을 심하게 보인다. 또한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자기 집단'이 있기에 그 집단성을 의존하고 그것 뒤에 혹은 그것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이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집단'이라는 것도 사실은 '확장된 자기, 확장된 나'에 불과하므로 결국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기 혼자' 존재한다고 여기는 심리는 마찬가지가 되겠다.


이런 사람들은, 개인이든 혹은 집단 어떤 경우든 타인들 그리고 다른 집단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배려하지도 않는다. 그냥 '나' 혼자, '자기' 혼자 모든 걸 다 해 온 듯이 하고, 다 할 수 있는 듯이 착각한다. '자기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완전히 틀린 것인데, 무엇보다도 실제 현실이 그렇지 않다. 그 개체가 자기가 아무리 잘 났든 혹은 좋은 조건을 타고났든 결국 그가 그렇게 존재하게 되는 건 무수한 타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꼭 부모나 친적들 때문만은 아니다. 실은 그 부모나 친척들조차도 그들 혼자가 아닌 많은 타인들의 여러 형태의 도움, 기여로 그렇게 존재할 수 있었기도 하다. 그러니 본인 자체는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실황이 좁은 자신의 시야에 보이지 않고, 자신의 사유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라고 여긴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당장 자신이 무시하거나 업신 여기는 그 타인들이 없다면 본인도 조만간 사라질 것이 뻔한데 그걸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집단이 잘나고 그리고 스스로들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하고 이룬 것 같이 착각한다. 그러나 그 역시 좁은 시각과 사유 안에서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먼 곳, 넓은 곳을 볼 수 있어도 결국 스스로 눈 앞을 가려 버리면 아주 제한된 것만 보든지 아니면 아예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결국 이것은 어릴 때부터 받아온 개인적, 집단적 교육과 사유,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틀이다. 그런 사고방식, 사유방식, 가치관, 신념 등의 영향을 계속 받아서 실제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믿게 된 것이다.




'타인 없는 자기의식은 병증의 자기의식'에서 핵심은 '병증'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잘못도 무엇도 아니다. 아주 유용한 설정이며 동시에 기능이다. 잘 이용하면 할수록 이점이 많다. 그런데 최근의 한국 사회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사회라도 마찬가지인데, 자꾸만 타인이 없는 '자기의식'이 왜곡되어 발동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즉 타인에 대한 고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이 '자기'만을 의식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크게 봐서 이것을 현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문제 혹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것도 상당부분 맞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즉 자본주의 문명이므로 오는 한계와 문제도 있고 동시에 어느 시대, 어느 문명이든 인간 공통으로 '자기의식'이 병증이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로 봐야 한다.)


'자기의식' 자체는 병증이 아니다. 물론 불교 등에서는 이러한 '나 의식', '주체 설정'을 절대시 하면서 그에 수반되는 근본적인 인간 번뇌, 고뇌, 고통, 분노, 무지 등을 일찍이 착파하고,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보여줘 오긴 했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접근으로는 이것이 맞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고 해도 '나 의식, 자기의식'은 꼭 병증이나 없애야 할 무엇은 결코 아니다. 그냥 하나의 효율적인 기능이다. 우리의 목표는 그 '정체'를 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자기의식'이라는 것의 그 실체, 본래의 정체와 구조를 눈치채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는 이 설정, 기능을 최대한 잘 이용하는 것이다. 그 정체를 눈치챔으로써 더 이상 불필요한 집착, 고집, 충돌 등을 만들거나 겪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타당한 내용이다.


이러한 근본적 깨우침, 깨달음 등의 관점과 접근은 사실 모든 사람이 추구하기에는 조금 거리가 있다. 그게 어렵거나 복잡하다기보다도 사람들의 관심사나 탐구의 대상으로서의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흥미를 가지고, 그 본질을 탐구하는 것으로서는 아직은 좀 거리가 있는 것이다.

(물론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실제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탐구를 하고, 마침내 그 정체를 깨쳐 버리게 되면 좋은 것이겠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그리 될 것이라 기대 된다.)


'타인 없는 자기의식은 병증의 자기의식'이라는 주제의 제시는, 자기의식을 전제로 할 때 건강한 자기의식과 병증의 자기의식의 구분을 보자는 말이다.


즉 '나-너', '주체-객체'의 구도 자체가 애초에 함께 생성되고 함께 소멸되는 구도인데, 이제 이렇게 해서 생겨난 '나, 자기'가 잘못된 교육이나 가치관에 의해서 마치 '너, 타인, 대상'들이 없는 것인 양 혹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여길 때 그것은 '병증'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동시에 존재하는 '하나인 두 극성'을 마치 완전히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별개인 것처럼 잘못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병증의 자기의식을 가지게 되는 원인은 몇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의 교육, 성장 환경이 원인이 될 수도 있고 또한 그 사람 본인이 자신이 실제 접하는 현실과 관계 속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섣부르게 '나만 존재한다, 내가 잘나서 이 모든 게 가능하다'로 게으르게 인식하는 것도 원인이 될 수 있다. 즉 '인식적 게으름'인 것이다.


"뭐가 잘못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나는 실제 내가 잘 났고, 열심히 해 왔고, 남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 내가 속한 내 집단도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 너희들, 타인들, 다른 집단들보다 내가 좀 더 잘 났다고 해서 그게 왜 내 잘못이 되어야 하는가? 너네들의 잘못은 없는가? 좀 더 노력하고 애쓰면 너희도 나처럼, 우리처럼 된다. 그러나 너희는 그럴 능력과 가치가 없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인식적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이다. 실제 본인의 노력, 재능 여부와는 별개로(사실 그와 그 집단의 노력이 실제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금수저론처럼 공짜로 받은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비겁한 방법이나 착취로 많은 것을 쌓는 경우도 가능하다), 자신(들)의 지금 상황이 어떻게 해서 가능했는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상으로 생각을 못하는 혹은 안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지'이기도 하다.


게으름과 무지이기도 하지만 또한 '고집'이기도 하다. 자기가 가지게 된 어떤 관념, 생각, 가치체계 등을 지나치게 고집하는 것이다. 충분히 주위를 둘러보고, 그 당위성이나 타당성을 따져본다면 얼마든지 재고할 부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금 내 생각이 무조건, 절대적으로 옳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또한 욕심과 탐욕도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한 관점, 가치관, 신념을 가지는 것이 자신의 현재까지의 욕심과 탐욕을 채우고 유지하는 데 더 유용하기에 계속 가지는 것이다.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순수히 홀로 존재하는 개인, 개체, 나, 자기'는 오히려 환상이다. 사실은 이게 불가능한 것이다. 이 환상성을, 불가능성을 되도록 선명하게 눈치채야 한다. 알아채야 한다. 왜냐하면 환상에 따라 살면 살수록 혼란과 고통이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병증'은 고통을 유발한다. 지금 당장 자신과 자신의 집단은 멀쩡해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길 터이지만, 자신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고려하지 못하는 타인들과 다른 집단들이 우선 먼저 고통을 당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부작용은 더 심각해지면서 결국은 자신이 속한 전체 공동체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본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권력에 의해 그러한 공동체적 고통을 잘 경험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타인에 대한 고려와 배려가 없는 자기의식'을 가지는 것 말이다. 그렇게 해도 당장 본인들에겐 아무 문제도 없고 오히려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좋으니까. 그러나 한 사람의 몸의 장기들이 각자 따로 놀면 결국 이상이 생기고 죽음에 이르듯이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당장은 자기와 자기 집단은 멀쩡하고 괜찮은 듯 하지만 결국 전체가 망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사실 '타인 없는 자기의식'으로 똘똘 뭉친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완전히 그런 건 아니다. 즉 그들도 나름대로 그들의 조직, 그룹, 공동체에서 '타인'들을 설정하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하고 서로서로 의존도 하고 한다. 문제는 그 대상과 범위가 너무 좁다는 것이다. 자신들이야 자신들의 이너써클 안에서만 서로 관계를 맺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겠지만 그건 하나의 착각에 불과하다.


또한 실제 관계를 맺는 범위야 인간 그 누구이든 사실 일정 수의 제한이 있게 마련이므로 모든 이가 어느 정도 이상의 타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오히려 불가능하기도 하다. 무조건 많은 사람들을 사귀거나 활발한 교우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 경우 핵심은 그러한 '실제 관계를 맺는 수와 범위'가 아니다.


핵심은, 내가 '생각할 수 있고 고려하고 배려할 수 있는 타인들의 범위'이다. 이 범위가 넓을수록 건강하고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실제 직접적 관계를 맺고 안 맺고 상관없는 일종의 '의식적 범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도덕적, 윤리적 측면이 아니다. 가장 실용적이고 유용한 측면에서이다.


그 범위가 좁으면 좁을수록 그 조직, 그룹, 공동체, 집단, 사회, 국가는 점점 병들어 가고 결국 와해된다.그 범위가 넓을수록 타인들 그리고 전체 공동체가 더욱 건강해지고 행복해진다. 전체 공동체가 행복해지만 결국 그 안의 구성원인 자기와 자기집단도 행복해진다. 이것은 이미 그러한 건강성을 회득하고 잘 유지해 가고 있는 공동체, 사회, 국가들을 보면 선명하게 알 수 있다.

(물론 개인적인 상황이나 입장, 심리적인 문제 등에 의해 스스로 원하면서도 타인들과 쉽게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경우는 별개이다. 이 경우는 적절한 치유와 자기 변화로 건강하고 상식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타인 없는 자기는 병증의 자기이다. 좁은 자기 집단에만 해당되는 왜곡된'우리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둘은 동일한 병증의 의식이다. 현실적으로도, 본래의 구도로서도 그렇다.(되도록 그 범위를 넓게 가지는 건강한 '우리 의식'은 좋다) 


우리가 이왕 '나'라는 설정, '자기'라는 설정을 하고 그를 이용하면 살아간다면 제대로 하는 것이 낫다. 되도록이면 건강하게 하는 것이 좋다. 


언젠가는 이 '나, 자기, 주체'의 설정의 과제도 해결을 하긴 해야 하지만, 그 전에라도 좀 더 바람직한 자기의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게 서로에게도 좋다. 


'혼자만의 자기'는 가장 불가능하고,

가장 허황되고 어리석은

상상이자 환상에 불과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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