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이라는 의자 위에 앉아서 그 의자를 들 수는 없다
인식과 비인식은 항상 같이 존재한다. 우리 의식은 인식과 동시 혹은 그 직후에 생겨나기 때문에 의식은 곧 인식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인식 혹은 의식이 존재하는 동시에 그와 상관없는 비인식 혹은 비의식의 영역 혹은 양태도 같이 존재하고 있다.
뭘 특별히 알아채거나 깨닫거나 하지 않아도,
지금 바로 여기 항상!
그런데, 인식 혹은 의식은 그 자체가 비인식 혹은 비의식의 반대 양태이므로 인식과 의식으로 비인식과 비의식을 알 순 없다. 안다고 하는 순간 인식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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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 혹은 의식이, '다만' 인식 혹은 의식일 뿐임을 선연히 눈치채기.
오직 이 방법뿐.
어떤 순간에, 이것을 더 이상 무르지 못할 선명도도 확연하게 알아채게 되는 것.
'어, 지금 나도 이미 생각으론 그런 구도와 구조를 알고 있는데. 그런데 왜 아무런 눈치챔이나 뭔가 변화가 없지?'
당연히 이 의문이 들 수 있다.
그건, 여전히 '그것'을 인식으로만 접근한 때문이다. 인식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눈 앞에 차가운 물이 있는데 이제 더워서 그 물을 확 뒤집어써야 하는데 실제 뒤집어 쓰지는 않고 여전히 물의 차가움 등에 대해서 인식으로만 접근하는 셈이다. (혹은 의자 위에 여전히 앉아서 의자를 들려는.)
어느 순간에 물을 확 뒤집어쓰듯 되어야 한다.
의자에서 내려와야 한다.
물의 비유든, 의자의 비유든 그 의미를 앎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자각이 없는 이유는, 끝끝내 마지막에 잡고 있는 것, 의지하고 있는 것, 의존하는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뭘까?
바로 인식과 의식에의 여전한 중독이다. 고집이다.
이 경우엔 인식이라고만 해도 좋다. 바로 '앎'으로 모든 것, 어떤 것을 파악하려고 하는 그 관성, 습관, 고집, 의존.(불가에서는 이걸 무명, 무지라고도 한다)
그 앎 자체가, 인식 자체가 의자이다.
의자 위에 앉아서는 의자를 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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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 너머의 자리, 인식 너머의 자리는 항상 그 앎, 인식과 함께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든 못하든,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허공처럼, 배경처럼. 마치 우주라는 배경 안에 숱한 별들과 존재들이 있듯이.
거기에서 앎과 인식이 나오는 것이다.
앎과 인식이 뭐 나쁘거나 오염된 것이거나 그런 게 전혀 아니다. 그냥 하나의 일어났다 스러지는 현상, 회오리, 던져지는 돌멩이일 뿐. 또한 경우에 따라선 무척 유용하기도 하다.
그냥 앎 자체가 인식이다. 인식 자체가 앎이고. 그게 의식이고, 그게 '나'이다. 모두가 같은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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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앎과 인식에는 언어적, 비언어적인 게 모두 포함된다. 그런데 이론적으론 그 범위를 더 확장할 수 있다.
인간에게 포착되는 인간만의 앎과 인식이 아니라 동물적, 식물적, 광물적, 분자적, 원자적, 전자적, 소립자적, 초끈적... 이렇게 모든 층위의 앎과 인식 즉 의식이 다 포함되는.
하지만 거기까지 가지 않고 그냥 '인간의 언어적, 비언어적 앎과 인식'까지만 가도 된다. 인간의 의식적 앎에 더해 감각, 무의식, 직감, 직관, 촉으로도 알고 있는 앎을 다 포함하는.
이렇게 '앎의 정체' 혹은 구조, 구도를 또렷이 아는 것이다. 통찰하고 눈치채는. 차가운 물을 확 뒤집어 쓰듯이. 그러면 앎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단지 앎'일뿐이게 된다. 무슨 특별하거나 절대적이거나 전부인 것이 아닌.
뭔가를 더 알게 되는 게 아니라, '본래 그런 것'을 비로소 다시 눈치채는 것이다. 무척 소박한 것이다. 아무 것도 바뀔 것 없지만 동시에 모든 게 바뀌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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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대부분의 앎은, 앎으로 앎을 계속 구축해 가는 경우다. 과학, 기술, 사상, ~이즘, 철학, 종교 그리고 인간의 모든 판타지.
다 좋다. 상대적인 효용성이 있으면 이용해서 이득을 얻을 수 있으니까. 특히 과학과 기술 등이 그렇다. 그 외의 앎들도 그런 유용성, 효용성들이 있는 부분이 있다.
다만, 어떤 앎을 사용하든 '앎의 근본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고 들어가는 것'과, '앎이 어떤 진리, 사실, 절대가 될 수 있거나 그걸 찾게 하거나 그걸 만들 수 있다'고 믿으며 들어가는 것은 명백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후자는 오류이다. 앎의 본래 태생이 그런 게 아니므로.
아무리 깊게, 치열하게, 정교하게, 정밀하게 앎을 추구하고 구축하더라도 이것을 눈치채는 것이 먼저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