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 앎'은 다시 언어적 앎과 비언어적 앎으로 구분된다
'인간의 앎'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인간적 앎'이고 다른 하나는 '비인간적 앎'이다. 이것은 1차 구분이다. 그리고 2차로, '인간적 앎'을 다시 '언어적 앎'과 '비언어적 앎'으로 구분하자.
'비인간적 앎'은, 글자 그대로 인간의 인식에는 잡히지 않는 앎이므로 논의에서 제외한다. 인간의 인식에 잡히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의 오감과 인식 기능 그리고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기계와 수단을 다 사용해도 끝내 포착할 수 없는 앎의 영역을 말한다. 이 앎의 영역은 글자 그대로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영역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있다, 없다도 말할 수 없다. 다만 '비인간적 앎의 영역이 있을 수 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물론 궁극적으론 이 표현마저도 '인간적 앎'이다).
이제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인간적 앎'으로 돌아오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앎이 크게 '언어적 앎'과 '비언어적 앎'으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언어적 앎'은, 인간의 앎 중 인간의 언어 기능으로 파악되는 앎이다. '비언어적 앎'은 언어로 파악되진 않지만 감각이나 느낌, 잠재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앎이다.
거칠게 말해서, '전체 앎'의 구성 비율을 말해 본다면 아마도 비인간적 앎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고, 그중 극히 일부가 인간적 앎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 안에서 인간의 감각과 인식 기능으로 포착할 수 있는 앎은 아주 제한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인간적 앎은 바다와 같을 비인간적 앎에서의 물방울 하나와 같다 할 수 있다.
그 인간적 앎 중에서는 '비언어적 앎'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고 '언어적 앎'은 극히 일부일 것이다. 인간의 언어란, 다만 하나의 상징체계에 불과하며 실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극히 일부만, 그것도 상징적으로만 나타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비인간적 앎:비언어적 앎:언어적 앎'의 비율은 '99:0.99:0.01'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비율의 수치는 실제가 아니라 그 정도로 인간의 '언어적 앎'의 비율 혹은 포착도는 아주 낮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무심하게 스스로의 '언어적 앎'을 앎의 전부로 알고, 절대적으로 대접하며 살아가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