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으시기 전에 김필산의 단편소설 「페르펙티눔 왕과 그의 다섯 신하들」을 먼저 읽으시길 추천합니다.
작품에 대해 작가가 일언반구하지 않아도 독자님들이 알아서 작품의 숨을 뜻을 열심히 해석해 인터넷에 후기를 남겨 주시는 경우가 베스트겠죠. 제가 이렇게 작가의 말을 통해 ”이 부분은 이런 상징을 가지고 있고, 이 등장인물의 행동은 이러이러한 의미를 넣으려고 했고...“하며 주저리주저리 작가의 의도를 떠벌리는 모양은 썩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재미없는 농담을 하고 그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 청자에게 애써 농담의 해석을 강요하는 모양새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런 글을 남기는 데에 대한 변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훨씬 나중에라도 이 소설이 정식 출판이 될 때(종이책의 독서 경험이 아무래도 월등히 높으니, 그러면 이 작품도 더 많은 분들께 읽힐 수 있겠죠), 그 때쯤 가서 출판을 준비하면서 분명 작가의 말을 써야할 텐데 제가 작품의 기획 의도를 왕창 까먹은 상태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처의 첫 작품, 「책이 된 남자」도 지금 기획 의도를 써 보라고 한다면 앞이 깜깜할 터입니다) 이 작품 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도 미리미리 작가의 말을 써 놓는 습관을 들여 놓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은 읽으시는 분들께 여전히 “내 작품에 이렇게 많은 상징과 의미가 들어 있는데 제대로 알아보는 독자들이 없어서 내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고, 독자들을 참교육시켜 주어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한 글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보이셔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게 맞으니까요. 재미없는 농담 억지로 살리는 식으로 망한 작품에 뭔 상징이니 은유니 억지로 살리려고 애쓴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만약에 혹시라도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작품을 재미있게 읽으셨지만 뭔가 작가의 의도가 손에 잡힐듯 말듯 하여 숨은 의미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으시다면 이 글이 도움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인간의 의미와 왕국의 멸망」은 김필산 데뷔 훨씬 이전 2008년에 엽편의 분량으로 쓴 소설이었습니다. SF적 색채가 전혀 없는, 서양의 옛날옛적 동화 이야기같은 분위기의 소설이었지만, 그때도 스타니스와프 렘의 작품을 읽고 크게 영향받아 썼던 기억이 납니다.
기본 틀은 「인간의 의미와 왕국의 멸망」과 같습니다. 왕이 다섯 명의 신하에게 인간의 의미를 찾아오라 시킵니다. 다만, 원작과 달리 인물들이 전부 “인간이라 착각하는 로봇”입니다. 아니, 그들은 인간과는 달리 생명도 아니고 죽음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인간'이라는 단어로 정의내렸습니다. 아니, 어쩌면 ‘인간’이라는 단어의 번역 문제 (로봇어에서 한국어로의 번역시 생긴 오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다섯 신하로부터 인간의 의미들(생명 vs 죽음, 계승 vs 멸망 등)을 찾아내게 되어, 마침내 진정으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스토리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에 대해, 어렵고 외우기 힘들다는 얘기를 몇몇 분들께 들었습니다. 저도 이름이 어렵다는 의견에 대해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름들을 붙인 이유는, 역시나 스타니스와프 렘의 작품들 같은 분위기로 느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대해 이름의 의미와 의도를 설명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째 신하 ‘디미디아 비타스(Dimidia Vitas): 반만 살아 있는, 또는 반감기(Half life)라는 뜻의 라틴어. 그는 반감기를 가진 방사능 금속을 가져오고, 반만 살아있는 형을 받는다. (또한 유전자의 절반이 쪼개지는 감수분열의 의미도 담았다)
둘째 신하 ‘피보나시우스 프로스페르무스(Fibonaccius Prospermus): ‘번영하는’이라는 뜻의 prosperous + 피보나치 수열을 발견한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를 결합한 이름. 프로스페르무스는 호모라고 불리는 ‘번영하는 생물체’를 가져오고, 조각조각 쪼개져서 번영한다. (피보나치의 의미는 후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셋째 신하 ‘셀피시우스 멤미우스(Selfisius Memeus)’: “이기적 밈(meme)”. 그는 밈의 일종인 경전을 가져오며, 경전을 제작해 스스로 밈을 창조하기도 한다. 멤미우스는 ‘계승’의 의미도 담는다.
넷째 신하 ‘막시무우루 엔트로피우스(Maximuru Entropius)’: ‘최대 엔트로피’, 죽음, 우주의 종말, 블랙홀 등을 떠오르게 하는 개념. ‘-무우루’라는 단어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보스 중 “엔트로피우스”의 이명인 “므우루”에서 가져왔다.
다섯째 신하 ‘디비노 디비수스(Divino Divisus)’: Divine Divisor, 즉 소설의 큰 테마인 '완전수'의 약수(divisor)를 나타내는 이름. 신성한(divine)은 재미있으라고 언어유희적으로 붙였다. 그가 왕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이야기는 생명의 차원이 아닌 ‘국가‘의 레벨로도 인간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음을 뜻한다.
왕 ‘페르펙티눔(perfectinum)’: 완전수(PERFECT NUMber)’
작품을 통해 제가 강조하고 싶었던 테마는 '죽음'과 '생명'의 개념을 수열로 풀이하는 것입니다.
죽음: 0으로 수렴하는 수열. 방사능 금속의 반감기. 1, 1/2, 1/4, 1/8...
생명: 무한으로 발산하는 수열. 피보나치 수열. 호모가 번식할 때의 수열은 2, 3, 5, 8...로, 발산하는 피보나치 수열이다. (피보나치 수열은 '토끼의 번식' 수열로 유명한데, 실제로 토끼의 번식 수열은 "1"을 토끼 한 쌍으로 보기에 작품 내에서 언급한 수열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함.)
'생명'도 아니고 '죽음'도 모르는 로봇인 등장인물은, 당연히 수렴하는 수열도, 발산하는 수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고작 1/2나 1/4정도만 이해하려고 해도 머리가 뜨거워지는 등의 부작용이 생깁니다. 생명이 아닌 로봇 인식의 한계입니다. 그들은 단지 유한한 원소를 가진 집합 정도의 인식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식은 '6의 약수 집합' 따위만 겨우 이해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6의 약수의 집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2, 3, 6}
물론 1+2+3=6이라는 성질 때문에 완전수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전 이 집합이야말로 유한집합일지언정 앞서 논의한 죽음의 수열과 생명의 수열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재미있는 집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2=3, 1+2+3=6이라는 특성은 전 항들을 더해서 새로운 항을 생성시킨다는 피보나치 수열의 특성과 닮았다.
6을 둘로 쪼개면 3이고, 2를 둘로 쪼개면 1이다. 이는 1/2, 1/4, 1/8로 향하는 반감기의 수열을 연상시킨다.
그리하여 디비수스는 이 '신성한 약수'들을 이용해 여러 가지 수비학적 연산을 해 보다가, 1보다 작고 0으로 수렴하는 무한한 반감기 수열이라는 인식 확장을 이루어 내게 되지요. (작품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물론 그는 6 너머 무한대로 발산하는 피보나치 수열의 인식 확장도 이루어냈을 것입니다.)
6의 약수 집합은 등장인물들의 대립을 통해서도 나타내 보았습니다. 일단 메인 등장인물인 왕과 다섯 신하들은 바로 완전수 ‘6’을 나타냅니다. 왕이 '약수 1'이라 한다면, 다섯 신하들은 약수 2 또는 3이 되어야 하겠죠. 신하들을 2의 그룹이나 vs 3의 그룹 짝으로 묶을 수 있는데, 그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돌아온 신하 대 돌아오지 않은 신하 (비타스, 프로스페르무스, 멤미우스) vs (엔트로피우스, 디비수스)
왕에게 협조한 신하 대 협조하지 않은 신하 (비타스, 프로스페르무스) vs (멤미우스, 엔트로피우스, 디비수스)
(재미없는 농담 굳이 설명하기: 비타스와 프로스페르무스의 짝은 “live half and prosper"라는 구절을 만듭니다. 이건 ‘스타 트렉’의 명대사, "live long and prosper"를 더 생명의 본질에 가까운 형태--자신의 수명을 깎아 번식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임--로 다시 생각해 보게 합니다.)
이러한 2 vs 3 대립 짝을 여러모로 억지로 묶을 수 있어 보이긴 합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요.
0으로 향하는 수열 vs 무한대로 향하는 수열: (비타스, 엔트로피우스, 디비수스) vs (멤미우스, 프로스페르무스)
생명 층위 vs 국가 층위: (비타스, 프로스페르무스, 엔트로피우스) vs (멤미우스, 디비수스)
이런 짝들은 흥미롭긴 하지만 작품의 구성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싶었던 주제는 처음에 말씀드린 두 가지 대립 짝이었습니다. 여기서 멤미우스라는 핵심적인 인물이 도출되었습니다. 멤미우스는 처음엔 돌아온 신하 쪽의 구성원이었다가, 결국 왕에게 협조하지 않은 신하 쪽의 구성원이 됩니다. 이 흐름이 이야기를 만드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작 ‘인간의 의미와 왕국의 멸망’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멤미우스라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발탁된 순간이었습니다.
메인 테마 이외에 자잘한 의도들을 (정말로 내가 까먹을 것에 대비해) 써 보려고 합니다. 사소한 상징들이라 여기서부터는 정말로 "재미없는 농담 설명하기"일지도 모릅니다.
호모에 대해 설명하는 프로스페르무스의 말, ‘부모 클래스’와 ‘자식 클래스’, 그리고 객체로 나뉘어 번영하게 된 프로스페르무스 등 ‘클래스’와 ‘객체’라는 용어는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언어의 개념에서 나왔습니다.
‘모드’도 컴퓨터의 작동 방식을 의도하였습니다. 키보드의 ‘한글/영문’ 모드처럼, 이들의 모드는 두 가지의 상태(로봇/생명)가 있으며 상태 간 공유하는 성질이 없습니다.
비타스가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하고 묻고 왕이 ’확인‘하는 장면도 윈도우 등의 Graphic User Interface에서 흔히 보이는 ’확인‘ 버튼을 누르는 팝업창 처럼 느껴지도록 했습니다.
엔트로피우스의 하인 ‘아겐티우스’라는 이름은 컴퓨터 분야에서 에이전트(agent)에서 따왔습니다. 단지 도움을 주는 하인이기 때문입니다.
비타스가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형태는 tRNA를 의도했습니다.
또한 반만 살아있게 된 비타스의 눈 앞에 절반의 금속을 양 눈에 제시하는 실험은 뇌량이 절제된 환자에게 양 눈에 다른 자극을 제시하는 심리학 실험의 장면을 떠올리고 쓴 장면입니다.
비타스의 좌뇌에 언어중추가 없다는 설정도 인간 뇌의 성질을 참조한 것입니다. 좌뇌가 죽어버린 채 우뇌만 작동하는 로봇 역시 인간처럼 왼쪽 몸 절반만 컨트롤할 수 있습니다.
양자 얽힘을 통해 메시지를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전달하는 건 원래는 불가능합니다. 양자 비둘기 통신은 단지 설정에 불과합니다.
블랙홀에 홀로그램으로 필산하는 장면은 ‘홀로그램 우주론’을 참조하였습니다.
디비수스가 블랙홀 표면에 그린 6의 약수에 대한 다이어그램은 그가 연구한 수비학이 유대교 신비주의 이론인 ‘카발라’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쓴 것입니다.
백성들이 번식하는 방식은 인간처럼, 왕과 비타스가 번식하는 방식은 개미처럼 그렸습니다. 이에 따르면, 왕은 사실 ’여왕‘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