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아메리칸 초능력 SF
이 아프리카스럽고도 이색적인, 깊은 상상력을 펼치는 소설이 미국의 슈퍼히어로 코믹스에 영향을 받았을까? 주인공 ‘아냥우’와 안타고니스트 ‘도로’는 슈퍼 초능력을 가졌고, 아냥우는 이윽고 세계 각지에서 차별받는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모으고 다니던 도로와 만난다. 아냥우는 그의 이상에 얼마 정도 동조해 길을 따라 나서지만, 곧 타협할 수 없는 사고방식의 차이에 의해 히어로 아냥우는 빌런 도로에 맞서 싸우기로 한다…엥? 이거 완전 엑스맨 스토리 아니냐? 물론 엑스맨에서는 초능력자들을 모으러 다니는 사람이 ‘프로페서 엑스’라는 선한 인물이긴 하지만.
그러나, 미국의 수퍼히어로 코믹스와는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이 소설에 존재한다. 그것은 초능력의 근원과 한계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이다. 엑스맨에도 변신하는 능력을 지닌 ‘미스틱’이라는 캐릭터가 있는데, 그녀에게 있어서 변신이란 그냥 변신이다. 그녀는 어떤 사람을 만나면 바로 그 모습을 복제해 변신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로 변신하는 능력을 지닌 아냥우는 한 번 보는 것으로 복제가 가능하지는 않다. 해부를 해 보고, 먹어 보고, 그 구조를 시각적으로 확인해 봐야만 비로소 그 동물로 변신이 가능하다. 초능력에 한계가 있다면, 캐릭터의 심적 상태나 행동을 좀 더 풍부하고 깊게 해 준다.
특히 아냥우가 돌고래가 된 후 느끼는 ‘돌고래적’ 감각에 대한 묘사는 마치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의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라는 유명한 칼럼을 떠올리게 한다. 박쥐의 초음파 감각을 가지지 못한 우리가 박쥐로 변신한 후에 초음파 감각을 언어적으로 설명하거나, 공학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 돌고래로 변신하면 우리는 돌고래의 감각 (돌고래도 초음파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을 온전히 느끼고 다른 돌고래 개체와 초음파 언어로 사고하고 소통할 수 있을까? 네이글은 못한다고 보았지만 소설의 아냥우는 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녀의 초능력적인 인지 능력 때문이다. 아냥우의 초능력은 변신 이전에 언제나 ‘인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초능력을 이렇게 그린 픽션이 존재했었나? 거의 모든 픽션에서 초능력은 언제나 둘로 나뉘었다. ‘인지하는 능력’과 ‘행동하는’ 능력으로. 인지하는 능력이란, 남의 생각을 읽는 마인드 리딩 능력, 물체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아는 사이코메트리 능력 등이 있고, 이에 대비하여 행동하는 능력은 남의 생각을 조종하는 마인드 컨트롤 능력과 물체를 원격으로 이동시키는 염동력이 있다. 두 능력을 다 가진 초능력자는 전지전능한 신 밖에는 잘 없다. (굳이 따지자면, 왓치맨의 닥터 맨해튼?) 그런데 아냥우의 능력은, 말하자면 마인드 컨트롤을 하기 위해서는 마인드 리딩이 선행되어, 그의 무의식 구조까지 속속들이 파악해야 한다고, 그것도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의식과 초능력에 대한 설정은 주인공과 안타고니스트의 인물 갈등 관계에 깊은 구조를 더한다. 주인공 아냥우는 동물과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심지어 그것들로 변신할 수 있다. 안타고니스트 도로는 이해하지도 변신하지 않는다. 육신을 옮겨갈 뿐이다. 아냥우는 육신을 이해하고 인지한 후에, 그에 따라 육신의 병을 치료까지 할 수 있다. 도로는 자신이 깃든 몸이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없으며, 심지어 그의 초능력에는 항상 죽음이 동반된다. 아냥우는 어쨌든간에 기본이 되는 육신 하나로 삶을 살아가며, 인간에 가깝다. 도로에게는 육신에 아무 미련이 없는 정령이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결국 아냥우는 ‘힐하는 만인의 어머니’, 도로는 ‘죽음의 육종사’라는 반대 포지션이 되었다.
그러나 그 둘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둘 모두 영생의 힘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다. 각각 따로따로 영생을 얻은 과정과 그 메커니즘이 다를지라도, 결국 둘만 영원히 살아간다. 모든 인간에게 찾아오는 죽음이란 존재는 이 둘에게만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그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사그러져갈텐데, 그들이 달리 서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결말의 행동 외에 무엇이 있는가? 그런 점에 있어서, 소설의 결말은 완벽하다. (내가 책을 읽으며 몇십 번이나 속으로 ‘싸우지 말고 둘이 화해해’라고 외쳤다는 걸 밝힌다.)
마지막으로, 도로의 도덕성이 “그렇게까지 나쁜 것인가?”라고 물어보고 싶다. 그는 차별받고 고통받는 초능력자들을 모아 사회를 이루게 해 주었고, 번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쁜 놈인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부족원들을 ‘마치 가축처럼’ 육종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엄한 규율로 배신자를 다스리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도로를 현실 정치가의 비유라고 본다면 그렇게까지 나쁜 놈이 아니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가축처럼 육종하니 나쁘다고? 아니 사실 진짜 가축처럼 짝짓기 시키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 제약 하에서 어느 정도 자율성도 보장되기 때문에 단어 뜻 그대로 인간을 ‘육종’시키는 건 아니다. 죽음에 이르는 엄한 규율? 엄한 건 맞지만 원래 모든 통치체제에서 정치적 배신자에게는 최대 사형까지 내려지는 게 원칙이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관점 전환을 해 보자면, 도로가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아니고, 아냥우와의 갈등은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고 그냥 종이 한 장짜리 의견 차이였다는 소리다. 이 소설이 페미니즘 관점으로 해석하기에 매우 교과서적인 소설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남성성’을 대표하는 도로라는 캐릭터에 ‘현실 정치가’라는 또 다른 해석을 부여하고, 그의 철학과 행동에 용서를 구하는 바이다. 내가 이 소설의 결말을 사랑하기로 한 두 번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