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인류의 영원한 숙적인 죽음과 그것을 극복하는 영생이라는 테마로 지어진 이야기들은 수없이 많고 인간 본능을 자극한다. 재미있는 점은 영생을 얻은 캐릭터들이 생각지도 못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 대가란 보통은 끝없는 삶을 살게 되며 받는 ‘지루함’이란 것이다. 『퇴마록』에 나오는 ‘아하스 페르쯔’라는 캐릭터가 매우 기억에 남는다. 십자가 진 예수를 모욕하여 영원히 죽을 수 없는 저주에 걸린 그는 끝없는 삶에 지치고 지루했던 나머지 2000년 동안 마법을 열심히 수련해 인류 최강의 캐릭터가 되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키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오는, 무한정 수명이 늘어난 와우배거라는 캐릭터도 있다. 그는 영생의 대가로 지루함이라는 저주를 받아, 전 우주의 모든 인물들을 모욕하는 재미로만 삶을 영위한다.
Old Man’s War — John Scalzi
영생과 그 대가를 경제학적으로 풀어 보자 하면, 『노인의 전쟁』 같은 스토리가 나올 수 있다. 인간을 영생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건 죽음의 공포도, 삶의 욕구도 아니다. 경제학적 필요성이다. 사회에 노동력이 필요하고(전쟁터의 군인), 인간을 영생시킬 수 있는 제반 과학기술의 비용은 매우 저렴하다. 그러나 전쟁터에 지원할 만한 사람은 늙은이 뿐이다. 그럼 결국, 젊은 놈들은 놔두고 노인들이 알보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가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 상황 또한 영생은 저주이다. 받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 즉 공짜 점심은 없다.
여러 가지 설정 상의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과연 노인들이 그 험한 군생활을 ‘다시’ 하고 싶어할 것인가? (아 이건 대한민국 남자들만의 얘기인가?) 과연 노인들이 다시는 고향땅에 돌아올 수 없다는 제약을 받아들이고 드넓은 우주에 나갈 마음이 생길까? (내가 느끼고 있는 노인들의 이미지는 고향 땅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한 사람들이고, 또 우주니 모험이니 하는 이미지에도 안 맞다.) 과연 ‘할머니’들이 또 그런 모험을 감수하고 영생을 얻고 싶어 할 것인가? (페미니즘 문학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여성 캐릭터는 목적이나 동기 등에 대해 남성 캐릭터와 좀 달라야 하지 않나?) 뭐든지 따지면 말이 안 되지만 사실 ‘영생’이라는 선악과의 달달함이 끝내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뭐 다 설명되긴 할 것이다.
2. 홉스적 우주
칼 세이건의 『콘택트』에서는 외계인이 인류에게 막 과학기술을 퍼준다. 왜냐하면 칼 세이건의 낙관주의 우주론에 따라, 우주는 사랑과 평화, 계몽이 넘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류츠신의 『삼체』서 우주는 다수 외계 문명 사이의 (말하자면) 핵전략에 의한 공포의 균형이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세계이다. 문명은 언제나 기회가 되면 다른 문명을 끝장내야 한다. 양 극단의 우주관에서 『노인의 전쟁』은 칼 세이건보다는 류츠신 쪽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문명들은 모두 서로를 멸망시키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다.
『노인의 전쟁』 세계관에서, 모든 문명들은 서로간의 협동도, 동맹도 없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홉스적 상태인 듯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정말로 가능한가? 인류 문명사에서 이런 홉스 상태는 곧 여러 문명들의 동맹과 연합으로 (적의 적은 나의 동지), 청군 대 백군 상태로 급속히 안정된다. 말하자면 게임 이론의 내시 균형 같은 거라서, 홉스 상태는 수학적으로 불안정하고, 청군 대 백군 상태는 수학적으로 안정하다. 그래서 이 ‘전부 다 적이야’ 상태가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정치와 외교의 필요성을 역설한 ‘벤더 상원의원 대사 장관 이병’의 멍청한 죽음은 개인적으로 좀 아쉬웠다. 작가 나름대로는 “이 소설은 피와 폭력을 그리는 소설이라고! 정치와 외교가 아니라!”라고 선언하려는 모양인데, 그 선언에 대해서는 존중하고 벤더의 죽음은 아쉬울 뿐 비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우주가 왜 이모양 이꼴인지, 정치와 외교가 필요없는 세상이고 왜 다들 다 적인 세상인지에 대한 그럴 듯한 설명이 없는지에 대해 비판할 뿐이다. (『삼체』에서는 그 설명이 너무나 그럴듯했고, 삼체와 비교하니 좀 떨어졌다 이말이다.)
— 스포일러 포함 —
3. 자아란 무엇인가
유령여단 여섯 살 제인의 등장으로 소설은 자아에 대한 거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아내 캐시의 텅 빈 몸에 제인이라는 자아가 들어갔다면, 제인은 주인공과 평생 같이 살았던 캐시라고 볼 수는 없을까?
우리의 컴퓨터과학 이론에 따르면, 제인은 캐시가 아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분리될 수 있고, 윈도우를 돌리던 PC에 윈도우를 삭제하고 리눅스를 깔게 된다면 이제 그 PC는 윈도우가 아닌 리눅스이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이분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육체-DNA-커넥톰(기억) 3분법인 것이다.
육체는 DNA로 만들어진다. DNA가 소프트웨어이고 육체가 하드웨어라고 친다면, 윈도우가 PC를 조립한다는 이상한 설명이 만들어진다. 커넥톰 또한 기반 시설은 DNA가 조립하지만, 커넥톰을 완전히 구성하는 것은 육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이다. 제인 내부엔 캐시의 커넥톰, 즉 기억이 완벽하게 삭제된 채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커넥톰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아니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만큼은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현실에서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으로는 커넥톰이 거의 정답이다.)
그러면 제인은 왜 주인공에게 끌리는가? 제인의 DNA는 캐시의 DNA이다. 현대 심리학에서 성격과 사회성이 DNA의 상당한 영향, 거의 50%의 영향을 받는다고 밝혔다. 삼국지 게임에서, 유비에 잘 등용되는 장수는 조조에게 잘 등용되지 않는 성향이 있는데, 숨겨진 파라메터인 ‘궁합’ 속성 때문이다. 유비는 조조와 정 반대의 궁합 속성을 가지고 있고, 장수들은 역사적 사실에 따라 유비와 조조의 궁합도에 잘 맞게 배치되어 있다.
제인 또한 DNA가 주인공의 DNA와 잘 맞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성격이 비슷한 사람들은 끌리는 경향이 있다. (성격이 다른 사람끼리도 끌리는 경향이 있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밝혀진 심리학적 연구에 의하면 그 속설은 반증되었다.) 이 경향에 따라 제인은 주인공에게 끌렸고, 그리고 자신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캐시라는 자아를 찾아낸다. 이 자아는 커넥톰 자아가 아닌, DNA 자아이다. 커넥톰이 보존되어 있다면 일은 매우 쉬웠을 것이다. 제인은 자신이 캐시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주인공과의 행복했던 결혼 생활 또한 기억해 내어 종국엔 즐거운 재회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DNA 자아, 즉 ‘궁합도’를 느끼는 정도밖에 못했던 제인은 주인공과의 느낌적인 느낌만을 느꼈다.
나는 이 부분이 이 소설의 가장 큰 가치라고 생각한다. 자아란 무엇인가? 라는 거대한 철학적 질문 앞에서, 커넥톰이나 기억이 아닌 DNA일 수 있다고 도발하는 이야기. 영화 『A.I.』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마지막 부분에 외계인(인지 인공지능인지 뭔지)가 엄마의 머리카락의 DNA를 바탕으로 엄마의 자아를 살려 낸다. 전혀 설득력이 없다. DNA를 바탕으로 자아를 만들어 낸다면 아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A.I.』의 마지막 15분은 영화를 망쳐버린 무리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DNA가 자아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A.I.』보다도 천 배 정도는 설득력 있게 그려 냈다. 이 부분이 이 소설의 가장 큰 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