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인간이 중력이 지구의 몇 배~몇백 배인 행성에 귀중한 아이템을 떨궜다. 그것도 하필이면 몇백 배의 중력이 작용하는 극지방에. 지구인이 그곳에 들어갈 수는 없다. 할 수 없이 지구인은 행성의 원주민인 지네 모양 외계인과 접선을 시도했다. 대양을 항해하는 교역 상인이었던 그 외계인은 다행히 가는 길에 그아이템을 가져와 줄 수 있다고 말한다.
Mission of Gravity - Hal Clement (그리폰북스판, 아작 구판, 아작 신판)
결말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는 평이하다. 단지 주인공이 지네 모양 외계인이라는 점이 눈에 띄는 특징일 뿐. 인물 간의 갈등이나 음모, 반전 같은 것도 없다. (아울러 지네 모양 외계인의 '사악한 면'이라던가, 사실은 순수했으나 외모로 받는 차별 때문에 괴로워한다던가, 그런 것 일절 없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하드SF의 고전으로 등극한 이유는 물리학적 엄밀함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배경 설정 자체에 있을 것이다. 사건의 중심이 되는 '메스클린'이라는 행성은 앞서 말한 대로 중력이 지구의 몇 배~몇백 배가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도상에서는 3G, 극에서는 665G이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차이나는 중력은 행성이 납작하게 짜부라졌기 때문이다. (적도 면의 지름은 76,800km, 극에서 극까지는 31,584km) 행성이 납작하게 짜부라진 이유는, (여러 물리학적 이유들이 있긴 하겠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행성의 자전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이다. 이 행성의 1일은 17.75분이다. 즉, 17분 45초만에 한 번씩 해가 뜨고 진다.
Meskling 행성의 크기와 표면중력
소설적 재미와는 상관 없이, 나는 여기서 질문을 던졌다. 중력이 한 행성 표면의 여러 위치에서 200배나 차이가 날 정도로 극단적이라면, 도대체 어떤 요인이 이런 현상을 만드는가? 나는 세 가지의 가설을 세웠다.
가설 1. 단지 납작하게 짜부라진 행성의 타원체(타원의 3차원적 형태)형 분포 때문일까? 타원체 모양일 때 중력이 달라지는 이유는, 질량 중심에서 먼 곳에 위치할 수록 중력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구에서는 산에 올라가면 중력이 (미약하게나마) 감소한다. 행성 매스클린에서도 적도에 다가가면 갈 수록 산에 올라가는 듯한, 마치 45,216km의 산을 등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여기서 추가로 한 가지 의문점을 더 제시해 보자면, 실제로 주인공 지네가 적도에서 극으로 여행을 한다. 그들은 '산에서 내려가는 것같은' 내리막길을 경험해야 하는 것 아닐까? 바다는 지표면에 고르게 분포하지 않고, 극지방에만 두껍게 쌓여야 하지 않을까? 이것에 대한 정답은 사실 간접적인 형태로 소설 내에 서술되긴 한다. 그렇다면 이 서술은 가설 1과 모순되는 것 아닐까?)
가설 2. 행성의 납작함이 이런 극단적인 중력 분포를 만드는 데 충분치 않을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분명히 행성의 질량 분포의 불균일함이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작가가 소설 바깥에서 밝힌 사실인데, 역시나 행성의 질량은 불균형하게 분포되어 있다는 설정이 있다. 중심부 내핵에 거의 모든 질량이 뭉쳐 있기 때문에, 가설 1의 경우와는 경우가 약간 다른 가설이 생긴다. 즉, 적도는 그 무거운 내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중력이 작다는 것이다.
Astounding Science Fiction - 1953
가설 3. 행성의 자전 속도가 급박하기 때문에 적도에 서 있을 때 원심력이 장난 아니게 클 것이다. 적도에서 원심력은 중력의 반대방향, 즉 머리 위로 작용한다. 극에서는 원심력이 0이다. 그렇다면, 극의 중력이 적도의 200배나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적도에서만 작용하는 원심력 때문일까?
내가 검증하고 싶은 건 세 가지 가설 중에 무엇이 옳으냐는 게 아니다. 세 가지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중력 차이를 발생시킬 때, 그 요인의 기여 비율이 몇대 몇대 몇이냐는 것이다.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적분까지 동원해 수학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저자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나 자신의 계산 능력은 오래전에 녹슬어버렸다." 그러므로 고전역학 수업을 최근에 들었던 누군가가 관심을 가지고 이 적분 문제를 풀어주면 좋겠다.
공상과학소설 읽으면서 별 시덥잖은 고민 하고 앉았네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애초에 이과생에게 이런 고민을 안겨주는 게 작가의 의도 아니었겠는가?
내 책이 ‘재밋거리’라는 것은 전체를 하나의 게임으로 여기는 데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게임을 즐겼고, 따라서 게임의 규칙은 아주 단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간단하다. 말인즉슨, 그 규칙이란 SF 독자에게는, 저자의 표현이나 암시 중 현대과학의 법칙에 어긋나는 요소를 가능한 한 많이 찾아내는 것이다. 저자에게 요구되는 규칙은 가능한 한 그런 실수를 적게 하는 것이다.
이과생 문과생 차별하는 것 같아서 좀 섭섭한 마음이 드는 문과생도 있겠으나, 최근들어 문과생 판인 이 문학계에서 수학공부 새빠지게 했던 이과생들이 잠시나마 우월한 느낌 가질 수 있는 이런 소수의 하드SF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면 좋을 것 같다. 자그마치 1953년, 70년 전의 SF는 낭만이 있었다. 중력 적분 문제를 풀지 못하는 자, 들어오지도 못하는 그런 빡센(하드) 낭만(SF)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