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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히어로의 세계를 만드는 방법

엽편소설

아시다시피, 우리의 세계엔 미국이란 나라가 있고, 미국이란 나라엔 '슈퍼 히어로'라고 불리는, 초능력을 가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돈이 엄청나게 많아서 보통 사람들에게 초능력처럼 보이는 능력 정도는 부릴 수 있도록 하는 장비들을 만들어서 쓰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회의 정의가 악한 이들, 사회를 어지럽히는 이들,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에 의해 더럽혀 지는 것을 스스로 참지 못하고, 결국 공권력의 무능함을 비판하는 동시에 마스크를 쓰고 나와 정의의 사도가 된 채 범죄자들을 처단하지요.


현실에 그런 슈퍼히어로가 탄생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아시겠죠. 그래서 저와 같은 사람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절 찾아와서, 자신이 슈퍼히어로가 되지는 못할 망정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을 만들어 내고 싶어한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네? 뭐라고요?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다 해 드릴 수 있는 건 아니고, 물론 패키지 형태로 출시되고 있긴 하지만 시뮬레이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긴 합니다. 그러면 제가 범용성을 띤 일반 시뮬레이션 제품, 그러니까 보통 G-SRN-154 라고 불리는 제품은 우리의 세계에 대한 모든 물리법칙을 내장하고 있으며, 그래서 사용자님께서 변수들을 조절하지 않는 이상 이 시뮬레이션은 우리의 세계와 가능성의 범위 내에서 한치도 틀리지 않는 세계가 탄생됩니다. 물론 말입니다―제가 범용성을 띤 제품이라고 말씀드렸죠?―사용자가 매개변수들을 어떻게 세밀하게 조정하느냐에 따라 세계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며, 결국엔 우리의 세계와 조금 다른 수준의 세계로부터 시작해, 기괴할 정도로 우리의 세계와 동떨어진 세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제품은 시뮬레이션학을 전공하는 전문가들이 이용하는 학술용이라고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물론 이걸 통해서도 우리의 세계와 어느 정도 닮았으면서도, 슈퍼히어로가 활동하는 그런 세계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만, 매개변수를 조정하는 일이 무척 어렵답니다. 전공자가 아니면 건드릴 수조차 없지요.


이것이 그래서 나온 제품입니다. 물리적 속성들―빛의 속도가 어떻고 중력상수가 어떻고―하는 것들은 하나도 신경쓰실 일 없고요, 또 포유류까지 이루어지는 진화의 역사까지도 우리의 세계와 완벽히 똑같으면서, 단지 침팬지와 호모싸피엔스가 나눠지는 순간부터 현재까지의 매개변수 몇 가지만 조절해 주시면 되는 것이죠.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슈퍼 히어로가 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용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이 용감할 필요는 없지요. 누구나 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다면, 이 사회는 누구나 다 위대한 슈퍼히어로가 되기 위해 조잡하게 만든 가면을 쓰고 밤거리를 다니는 이상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매개변수 조정에 실패하면 이런 사회가 됩니다). 아주 조금만, 가장 용기있는 사람에게만 조금의 용기를 더 높여 준다면, 그들은 슈퍼히어로가 될 것입니다.


변수의 조절 문제입니다. 여러 잠재요인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손님분께서는 단지 이 잠재요인들을 한꺼번에 조절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밖의, 현실세계의 이 '노드'를 조금만 올려주시면 됩니다. 신의 개입이라 할 수 있죠. 아, 물론, 어떤 점에 있어서는 신의 개입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시뮬레이션 안의 어떤 이가 물리적 법칙에 맞지 않은 잠재요인의 이상 증가를 발견하게 되고, 종교적 교리에 심취한 이들은 이 증거를 발판으로 당신의 존재를 발견할 것입니다. 뭐, 그게 좋은 일일 수도 있지만 말이죠.


하여튼, 그렇게 노드를 적절히, 조금만 올려주시면 곧이어 슈퍼히어로가 가면을 제작하게 될 것입니다. 재미있는 건 말이죠, 슈퍼히어로들이 가면을 만드는 그 순간 슈퍼빌런들도 똑같이 그들의 음모들을 계획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노드 말이죠, 아마 이걸로 조정하게 된 그 파라미터가 슈퍼히어로와 슈퍼빌런들의 출현을 동시에 초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로선 좋은 일이죠. 슈퍼히어로들에게도 그렇고요. 슈퍼히어로가 좀도둑이나 때려잡을 순 없으니까 말입니다.

아, 네? 뭐라고요? 아이고, 손님, 이건 그냥 게임입니다. 그 안의 사람들을 신경쓴다면 왜 굳이 이 짓을 하겠어요? 그 안의 사람 100명이 악당의 폭탄으로 인해 죽었다 해도 그게 손님한테 무슨 상관이 되겠습니까? 그 안의 정의는 그 안에서만 해결하면 될 일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그냥 재밌으라고 하는 겁니다. 정의를 지키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손님, 슈퍼히어로들을 그린 만화와 영화들이 애초에 왜 태어났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정의를 위해서라고요? 아니죠. 그건 그냥 재밌으라고, 작가가 돈을 벌려고 하는 거에요.


뭐 제가 이렇게 말씀드려도 어짜피 손님이 정하시는 거니까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중요한 건, 손님이 노드를 올리지 않으면 그 세계의 정의는 손님의 손으로 지켜짐과 동시에 게임은 시시해 지는 거고, 노드를 올리면 그 세계는 손님의 손에 의해 어지럽혀 질 테지만, 슈퍼히어로는 그의 정의를 지킬 수 있고, 게임은 박진감이 넘치게 될 겁니다. 네, 네, 그렇게 하세요. 카드로 하시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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