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원래 종이에 옮겨쓰기 전 머릿속으로 모든 것을 구상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일단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태초의 시작점으로부터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방대한 이야기, 주인공의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또 그의 자식이 주인공이 되어 자식을 낳는 무한한 등장인물들, 결코 멸종하지 않는 인간들과 종말하지 않는 우주, 그리고 끝을 상상할 수 없는 시간. 모든 인물과 배경과 사건이 그의 머릿속에서 정리되었다. 어떤 사건도 순환하지 않지만, 또한 어떤 사건이라도 무한히 반복되어 나타나게 되는 이 이상한 소설은 그의 머릿속에 모두 완성되어 종이에 옮겨 적혀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소설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발견했다. 머릿속으로 구상한 소설을 종이에 옮길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이와 잉크 전부를 써도 소설의 반의반, 백 분의 일, 십만 분의 일도 써내지 못할 것이다. 컴퓨터를 이용하기로 마찬가지였다. 소설을 저장하려면 하드디스크 수억 개로도 용량이 모자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보르헤스도 해내지 못한(다들 알다시피, 보르헤스는 '끝나지 않는 소설에 대한 소설'을 썼지, 무한한 소설 그 자체를 쓰지는 못했다.) 필생의 명작이 될 이 작품을 옮겨적을 방도를 생각해 냈다. 일단 그는 소설의 구조를 찬찬히 뜯어보았다(물론 머릿속으로). 이 작품은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을 묘사하는 모든 문장들이 유한하게, 또는 무한히 반복해서 등장한다. 하지만, 인간의 행동방식을 이루는 삶의 파편들,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생각의 편린들을 표현해 주는 의미의 종류는 무한하지 않다(왜냐하면,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엄밀한 증명을 보여줄 수도 있지만 골치 아픈 증명 따위는 생략하겠다.). 그러므로 이 소설이 무한을 창조해 내는 방식은 유한한 의미들의 조합과 배치를 통해서 새롭고 무한한 의미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또다시 놀라운 방식을 생각해 냈다. 소설을 이루는 더는 쪼갤 수 없는 의미의 조각들을 모두 모아서 번호를 붙였다. 그것은 매우 고된 작업이겠지만, 이미 무한의 소설을 창조한 그에겐 유한한 수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닐 것이었다. 그 목록은 매우 방대해서, 0번부터 시작되는 숫자는 자그마치 천만에 약간 못 미치는 목록이 되었다.
그는 특정한 숫자에 목록에 들어가는 의미의 조각들을 조금 중복시켜 0번부터 구백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구 번까지의 모든 목록을 채웠다. 그리고 그는 그 숫자들을 소설의 의미의 순서에 따라 나열했다. 그러자 우연히도 맨 앞자리부터 7번째까지의 숫자는 3141592가 되었다. 원주율 π의 첫 7자리의 숫자가 나오게 된 것이 그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때부터 의식적으로 소설의 플롯을 π의 끝없이 이어지는 숫자에 맞춰 재배열했다. 플롯은 뒤죽박죽이 되었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무한히 반복되는 소설에서는 언젠가 어떤 의미라도 한 번은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소설을 종이에 옮겨 쓸 수 있었고, '소설: 파이'라는 제목의 책표지를 넘기면, 달랑 한 페이지에 작은 글씨로 'π'라고만 쓰여있는 이상한 소설을 출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