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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다시 지내자구요?

by 낭만작가 윤프로


"잠깐 옆에 앉아봐라. 부탁이 하나 있는데, 네가 꼭 들어줬으면 한다.

이번 추석에는 조상님들 제사를 다시 지냈으면 좋겠다....


시집간 누나들을 봐라. ㅇㅇ는 몇십 년째 시댁 제사를 모시고 있고, ㅇㅇ도 벌써 시댁 제사를 물려받았다고 하고, ㅇㅇ도 제사 지낸다고 음식 하러 시댁에 간다고 하는데, 제사 안 모시는 집이 우리 집밖에 없는 거 아니냐?


너무 많이 준비할 필요는 없고, ㅇㅇ 어미한테 잘 얘기해서 과일이랑 생선이랑 전이랑 몇 가지만 준비해서 제사 준비하자고 해라"




아빠가 우리 가족도 이제 집에서 제사를 올리지 않고, 성당에서 미사를 바치는 것으로 대신하자는 선언을 하신 지는 벌써 15년 전이다.


이미 오래전에 작고하셨지만, 당시 옆집에 사시던 대부님의 도움으로 아빠와 엄마가 먼저 천주교 세례를 받으셨고, 아들 며느리까지 포함해서 성가정을 이루고 싶으시다는 아빠의 간절한 바람을 거역하지 못하고, 무교였던 나와 원래 개신교였던 아내는 몇 달간의 예비신자 과정을 거쳐 가톨릭 신도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개신교를 다니던 아내는 결혼과 함께 개종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고맙고 미안한 일이었다.


당시 아빠의 결정은, 표면적으로는 엄마의 건강 상태가 계속해서 혼자 제사를 준비하기에는 큰 무리가 따른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은 제사를 이유로 재가하신 할머니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우리 집을 찾아오는 것이 불편했던 이유가 한몫을 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객지 생활을 하는 아들과 며느리가 당신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사를 물려받을 것 같지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제사를 없애는 것이 처음부터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성당을 다니시지 않는 작은아버지와 사촌 동생은 더 이상 조상의 제사를 모시지 않기로 한 아빠의 결정에 크게 반대했다. 하지만, 본인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사를 물려받을 생각은 없었고, 돌아가신 작은어머니의 제사만은 사촌 동생이 알아서 따로 지내겠다고 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이후 명절 때 큰 집과 작은 집이 다 같이 모이는 일은 사라지게 되었고, 내가 작은어머니 제사에 참석하지 않으면서 사촌 동생과 내 관계도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부탁.

난 단호하게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사를 올리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내를 설득할 명분도 없지만, 앞도 잘 안 보이시고, 제대로 걷지도 못해 성당도 못 가시는 분이 무슨 제사를 지내시냐. 내후년이면 90세가 되시는데, 돌아가신지 70년 된 할아버지 제사 안 모신다고 누가 아빠를 뭐라 하겠느냐. 몇 해 전까지도 성당에 봉헌 미사 꾸준히 올리지 않았냐. 이번 추석에는 내가 부축할 테니 손주들까지 다 데리고 성당을 가자, 가서 그동안 밀린 고해성사도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신 조상님들 예물 봉헌도 하자고 하니......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 안 지낸다고, 아빠 엄마 제사도 안 지낼까 서운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려요. 아빠 엄마 돌아가시면 누나들 하고 돌아가신 날 다 같이 모여서 평소에 드시던 음식 올리고 기도도 하고, 제사도 지내기로 했어요. 돌아가신 뒤에 우리한테 하라 마라 하실 생각도 마세요. 그냥 우리끼리 알아서 할 거니까"


"알았다. 니가 싫다는데 내가 뭐 어떻게 하냐..."


명절이 아직 열흘이 넘게 남았는데, 이번 주말 당번일에는 또 어떤 말씀을 하실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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