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의 일상이 걱정되어 불안의 감정이 크다고 할지언정 회사를 떠나는 일만큼은 섭섭한 감정이 들지 않을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 '시원 섭섭'이라는 단어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다. 3년 5개월을 일하면서 힘든 일이 많았기에 섭섭하지 않을 거라 장담한 바는 아니다. 그저 미련 없이 떠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퇴사일까지 섭섭한 마음이 없을 거라 그리 믿었다.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약간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지난주부터 퇴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마시고 즐겼다. 동고동락한 P 개발팀을 비롯해 영업팀장, 개발팀장, 옆 동네 개발팀까지 야무지게 먹고 다녔다. 그런데 막상 퇴사 일자가 닥치니 마음가짐이 다른 거다. '어? 퇴사가 오늘이라고? 정말 퇴사하는 거야?' 끝이라는 생각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다. 시원 섭섭에서 섭섭은 1g도 없이 시원만 할 거라 생각했던 2주 전에 나에게 늦은 고백을 전해야겠다. '어쩌지. 안 시원하고 많이 섭섭해.'
내일 점심은 뭐 먹고 싶어요?
마지막 점심이니까 먹고 싶은 거 다 말해봐요. 나를 바라보는 열 개의 눈이 반짝였다. 마지막 날이니까 끝내주는 메뉴를 먹어야 한다는 말에 대답을 머뭇거리자 '혜경님은 찜닭 드실 때 표정이 제일 밝았어요. 저번에 봉추찜닭 되게 드시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개발자 K가 말했다. '오봉집도 좋아하시잖아요. 매운 음식 좋아하시니까 내일 점심 매운 거 먹으러 갈까요?' 이에 질세라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개발자 H도 말을 보탠다. '혜경님은 닭갈비 좋아해요. 맞다. 건너편 지하에 하얀 육개장도 좋아하시는데.'
내가 무슨 메뉴를 좋아하는지 개발자 대토론이 벌어졌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축축한 소 눈망울이 되었다. 이 사람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네. 나는 봉추찜닭을 좋아하고, 춘천 닭갈비를 좋아하고, 하얀 순두부 육개장을 좋아하고, 오봉집의 낙지볶음을 좋아한다. 후식으로는 지하 1층 카페의 생딸기 라떼를 즐겨 마시고 길 건너 편의 메가커피에서는 고구마 라떼를 자주 주문한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고 커피를 못 마시고 고구마 라떼를 마시는 나의 식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 새삼 감사해진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람들에 스며있었구나. 개발팀과 함께한 3년 남짓한 시간들은 서로를 길들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구나 싶은 거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가야 하니 시원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맞지.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오만 정 다 들어버린 대문자 T 무리를 남겨두고 가려니 눈물이 찔끔 난다.
그저께 송별회를 핑계로 신나게 치킨을 뜯고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신도림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개발자 J가 물었다. 마음이 후련하냐고. 나는 잘 모르겠다고 답하고는 잠시간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섭섭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마음이 그렇지가 못하네요.'
미련이 철철 넘쳐흐르는 날 보더니 J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후련하기만 하라고. 그동안 회사에서 고생만 했으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축하받으며 기쁘게 떠나라고. 앞으로는 건강만 하라며 웃어 보였다.
'혜경님은 섭섭하면 안 되죠. 그냥 시원만 해요. 섭섭한 건 우리만 할게요.'
진심을 전하는 올곧은 눈을 보며 생각했다. 나 회사 생활 잘해왔구나. 그동안의 고생이 다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3년이 넘는 시간을 버틸 수 있었지.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더니. J 당신은 나한테 대출받았으면 천냥 노예 탈출, 새로운 인생 시작이에요.
당신은 늘 우리 마음속에 있을 거예요. 이 안에 편히 잠드소서.
장난스레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K의 말에 깔깔거리며 웃던 시간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난 자리는 몰라도 든 자리를 티가 난다는 말처럼 공백을 메우느라 제법 고생할 것이라는 사실도 안다. 이따금씩 보고 싶어요, 징징거리며 말을 걸어올 거라는 사실도. 결국 공백을 메운 채 맞물려 돌아가겠지만 누군가 그리워할 작은 빈자리를 남겨두고 떠난다. 회사에서의 인연은 끝이 났지만, 결코 끝나지 않을 연임을 알기에 평화롭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