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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경 Sep 02. 2024

퇴사 후 인터벌 러닝을 시작했습니다

반려 밴드와의 동거, 다시 시작합니다




개발자 K에게 미밴드를 선물 받았다. 생일은 한참 지났지만 늦은 선물이라고 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전하며 감사히 받아 들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스마트 워치 같은 신문물과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 가까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쓰는 물건인고 싶어 가벼운 두통이 왔다. 맥도날드에서 키오스크 주문을 처음 하는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겠지. 작은 화면에 꽉 들어찬 QR코드만 쳐다보기를 며칠, 하얀 박스를 곱게 차려입은 샤오미 미밴드는 책상에서 방치되고 있었다. 


낯선 웨어러블 기기와 내외하는 시간이 지속되자 개발자 K가 미밴드의 행방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마다 손목 체크를 시작한 K 덕분에 난생처음으로 스마트 밴드의 세계로 입문하게 되었다. 스마트 기기에 관심 많은 K가 가성비 따져가며 샀을 텐데 대체 뭐 하는 물건인고 싶어 샤오미 미밴드8 사용법을 검색해 보았다. 사용법은 간단했다. Mi Fitness 앱을 내려받아 연동만 하면 즉시 사용 가능한 스마트한 녀석이었다.


내게 굴러들어 온 스마트한 녀석을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무게가 가벼워 손목에 부담 없었고, 무엇보다 걷기를 좋아하는 내게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오늘의 활동량을 채워 불이 켜진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오늘 하루 잘 살아냈다 칭찬받는 기분이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고 신난 어른이와 반려 미밴드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샤오미 미밴드 전도사가 되어 주변 동료에 자랑을 하면 개발자 K도 뿌듯함의 눈썹 까딱을 시전했다. 







반려 밴드와의 짧은 동거는 그의 사망으로 막을 내렸다.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QR코드가 뜨더니 작동을 멈췄다. 사망하셨습니다. 큐알코드를 아무리 인식해 보아도 엉뚱한 메시지만 보여줬다. 메시지를 검색해 보아도 살릴 길이 없다는 검색 결과만 나와 동공지진이 일었다. 만난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대로 좋은 곳에 보내줘야 하나 싶었지만 의지의 한국인은 포기할 수 없었다. 폭풍 검색 끝에 샤오미 AS 센터에서 새 제품으로 교환해 준다는 정보를 얻었고 새로운 반려 밴드를 획득해 냈다.


새로운 반려 밴드와의 동거는 순탄치 않았다. 만난 지 하루 만에 책상 서랍 속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푸꾸옥으로의 여행이 계획되어 있었기에 몸이 약한 미밴드는 함께 갈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서랍에서 영면에 들었다. 다녀와서 만나자 작별 인사를 나눴지만 그게 나흘이 아닌 한 달이 될 줄은 몰랐다. 푸꾸옥 여행을 핑계로 시작된 미밴드의 겨울잠은 한 달이 넘게 이어졌고 그의 존재는 잊혔다.


푸꾸옥 여행을 다녀온 후 한 달 동안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먹기만 했다. 새벽 비행기로 이동하며 바이오리듬이 깨어진 건지 모든 게 힘들게 느껴졌다. 좋아하던 걷기도 멀리하고 헬스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하혈을 하면서도 무리해서 헬스장에 가던 과거의 나는 온 데 간데없었다. 3박 4일의 여행으로 일상이 무너져 버렸다.


매일 밤 잠들기 전 바나나칩을 한 봉지씩 비워냈다. 마가렛트, 촉촉한 초코칩, 뻥이오 같은 옛날 과자들에 푹 빠져 입에 달고 살았다. 건강한 음식은 쳐다도 보기 싫었고, 맵단짠이 조화로운 자극적인 음식만을 갈구했다. 불가마 통닭을 주식처럼 먹으면서 생각했다. 나무늘보도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 같다고. 회사와 집, 피아노 학원을 아우르는 환상의 트라이앵글 사이클이 한 달 반 동안 지속되었다. 반려 밴드가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 건 퇴사한 다음날이었다. 






샤오미 미밴드를 다시 만난 건 퇴사 1일 차 아침이었다. 사소하지만 나만 알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시작을 반려 밴드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저 미밴드를 다시 착용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지런히 운동하던 그 시절의 나를 알고 있는 친구와 조우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려 한 달 하고도 20일 만에 헬스장을 찾았다. 


실은 살려고 갔다. 심각한 폭식 상태로 위가 안녕하시지 않아서였음을 양심 고백한다. 간밤의 퇴사 기념 파티 비스무레한 일정으로 위장에 한계가 왔고 뭐라도 해야만 하는 상태였다. 간단히 커리만 먹으려고 시작한 저녁 자리에서 술 한잔 마시지 않고 3차를 음식으로 채우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나도 토하는 줄 알았다.


샐러드와 라씨로 시작된 산뜻했던 저녁 식사는 탄두리 치킨, 탄두리 새우, 프라운 마크니 커리, 치킨 티카 마살라 커리, 버터난, 마늘난으로 채워졌다. 자리를 옮겨 치즈케이크와 아인슈페너를 들이키며 식사가 끝났어야 했으나 3차를 가는 재앙을 맞이했다. 스불재라 했던가. 스스로 불러낸 재앙은 걷잡을 수 없었고 떡볶이와 어묵탕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조합으로 위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다. 미련하게 음식을 흡입한 나는 소화불량으로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먹어댄 과거의 나를 책임을 지는 건 오늘의 나였다. 오후 일정이 있었으므로 늦지 않게 헬스장을 찾았다. 러닝머신만 간단히 하고 약속 장소로 이동하자는 생각이었다. 30분 인터벌 러닝으로 반려 밴드와의 만남을 가볍게 시작했다. 물론 간밤에 먹는 친구들을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폭식 후 다음날 굶으면 해롭다는 유튜브 운동 선생님들의 말씀에 따라 저녁은 최대한 가볍게 먹었다. 그리고 모든 일정을 끝낸 뒤 다시 헬스장을 찾아 러닝머신을 달렸다.


퇴사 1일 차 운동을 시작했다. 내가 불러온 재앙을 수습한다는 생각이었지만 덕분에 헬스장에 발을 들였으니 전화위복이라 포장하고 싶다. 내 사전에 작심삼일은 없다는 모토로 매일 헬스장으로 출근한다. 일정이 빠듯한 날은 약속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헬스장에 들린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30분만 걷자고 스스로를 독려한다. 좋은 사람들과의 저녁으로 마음을 채웠으니 몸의 밸런스도 맞추고 싶은 마음에서다.  


최근 바나나칩과 뻥이오를 모두 소진하고 호두와 검정콩을 간식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감자칩 대신 대추 방울토마토를 곁에 두고 입이 심심할 때마다 챙겨 먹는다. 여전히 식욕에서 자유롭지 않은 중생이지만 나를 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돌볼 수 있다. 날뛰는 식욕을 잠재우는 건 어렵지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건강한 음식을 섭취할 수 있다. 정해진 점심시간도 늦은 퇴근도 없는 삶. 최애 메뉴로 등극한 곤드레 밥만 있으면 화끈한 불가마 통닭도 부럽지 않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 운동을 갈 수 있고, 안양천을 벗 삼아 산책도 할 수 있다. 퇴사가 좋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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