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말하자면, 같은 사무실을 쓰던 옆 회사 동료와 불금을 보냈다. 대표가 5개의 회사를 운영하는 회사 컬렉터라 생긴 인연이다. 우리 회사는 작년 스타트업이 하나 둘 망해가던 시점에 강남에서 구로디지털단지로 이전했다. 재택근무를 하던 시절임에도 공용오피스에서 몇 천만 원씩 월세를 내다 망했다는 말이다. 쫓기듯 구디로 이전한 데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인데, 대표가 운영하는 회사 사무실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그렇게 하나 둘 망한 스타트업이 모여 5개의 회사가 한 층에 옹기종이 모여 일을 하게 되었다. 조직 운영의 편의성을 위해시너지 사업팀을 신설하기는 했지만 그 외 부서는 겹치는 업무가 없어 서로 데면데면했다.
옆 회사 동료 J를 알게 된 건 지난 연말 행사 때였다. 다섯 회사 직원들의 단합을 위한 연말 이벤트를 하게 되었고, 우리는 같은 조에 배정받아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인사 한번 나눈 적 없는 우리였지만 1등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이벤트에 참여했다. 1등 상품은 '반차'였고 우리는 구미가 당기는 상품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아쉽게도 공동 2등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참고로 2등은 휴게시간 1시간이라는 짜디짠 보상이 끝이었다. 반반차도 아니고 1시간은 거 너무한 거 아니오.
J와는 점심을 먹으러 갈 때, 물을 뜨러 카페테리아에 갈 때, 화장실 가는 길에 눈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레 편해졌다. 같이 점심 식사를 하거나 밖에서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마음이 가는 편한 사람이었다. 결이 비슷하다는 느낌이었다. 오다가다 마주치며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익숙해졌다. 비록 같은 회사는 아니었지만 퇴사 소식을 알렸고, 그렇게 회사 밖에서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에? 진짜 퇴사하신다고요?
이대로는 아쉬워서 못 보내요. 같이 밥 먹어요."
그녀가 먼저 저녁을 먹자고 만남의 물꼬를 터주었고 나는 옳다구나 하고 미끼를 물었다. 본인은 E 성향의 소유자지만 회사 생활을 하면서 I 성향이 짙어져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한 건 처음이라고 했다. 내추럴 본 I인 나는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았기에 뒤도 안 돌아보고 단박에 오케이 사인을 날렸다. 일사천리로 약속이 잡혔고, 그렇게 퇴사 후 첫 불금을 J와 보내게 되었다.
우리의 저녁 메뉴는 치킨이었다. 저녁을 먹자던 약속에서 자연스럽게 술 이야기가 나왔고 한잔만 찌끄리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장소는 예전 회사 동료들과 마늘치킨을 맛있게 먹었던 구디역의 치킨집으로 정했다. 매운 양념이 잔뜩 발린 불가마 통닭이 취향인 내게도 마늘 양념은 센세이션한 맛이었기에 J가 좋아할 거라 믿었다. 다행히 마늘 통닭은 취향 저격이었고, 우리는 1인 1치킨을 하는 위엄을 세웠다.
그녀는 소맥파였지만 나를 배려해 맥주로 선회해 주었다. 건강 때문에 평소 술을 마시지 않지만 나를 위해 기꺼이 금요일을 내어준 J와 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술 한잔으로 기분을 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게 무에 있으리. 첫 만남임에도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이어졌고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구처럼 편안했다. J와의 불금은 치킨과 맥주, 풍성한 대화로 가득 채워졌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 편한 술자리였다.
"요즘 MBTI에 푹 빠져있거든요. 혜경님은 MBTI 뭐예요?"
"저 INFP요. J랑 P가 49% 51%로 반반이긴 해요.
INPF랑 INFJ의 중간 어딘가라고 해야 할까."
"와. 저 ENTJ잖아요. INFP랑 완전 잘 맞는 거 알아요?'
평소 MBTI에 관심이 많다는 J는 엔티제로 인프피인 나와 궁합이 잘 맞는 성향이라고 했다. 찾아보니 두 유형의 궁합은 '우리 인연 영원히 뽀에버, 천생연분'이라고 한다. 뭔가 귀엽구먼. 코 쓱. 퇴사를 하게 된 이유에서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회사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한 달 먼저 입사했던 동료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팀에서 따돌림당했던 일과 지금 팀으로 오게 된 상황에 대해 듣자 J에 더 마음이 갔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지라 더 우쭈쭈 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바뀐 팀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고 지금도 무탈하게 일을 잘하고 있단다. 이간질을 하던 동료는 팀장이 되었지만 연봉협상이 순탄하지 않았는지 퇴사를 했다고 했다. 팀장이 사라지며 팀은 공중분해되었고, 모든 팀원이 자연스레 퇴사 수순을 밟았다고 한다. 권선징악의 결말이 따로 없다. 타인을 괴롭히고 감정 노동 시키는 악질들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본인이 당해봐야 정신 차린다. 흥.
J는 최근 책에 관심이 생겨 당근마켓에서 무엇인가 시리즈를 샀다고 했다. 무엇인가 시리즈가 뭔가 싶었는데 '정의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란다. 각 천 원에 파는 착한 당근인을 만나 4권을 업어왔다는 그녀는 덕분에 밤마다 숙면을 취하고 있다고 했다. 안 그래도 책이랑 서먹한데 벽돌 친구들로 시작하는 독서라니 쉽지 않겠다 싶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시작된 독서 라이프는 아직 15페이지에서 머물러 있다고. 책만 펴면 잠이 와서 당최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고 했다. 유명한 책부터 읽어서 교양 있는 녀성이 되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는 J가 귀여워서 웃음이 터졌다. 이동진을 좋아해서 유튜브를 자주 시청하는데 추천책들이 하나같이 벽돌이라 힘들다고. 최근 본 추천책은 '사피엔스', '총균쇠'라며 언젠가 읽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맥주 한잔으로 네 시간을 떠들어댔고, 세 달 뒤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J는 내가 추천해 준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를 완독하고 나오기로 했고,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프로그램 <나는 솔로>를 보기로 했다. 20기 정숙의 손가락 빨기 스킬은 듣는 것만으로도 컬처 쇼크여서 꼭 한번 봐야겠다 싶었다. 1:1 만남에 강하다는 정숙의 더티한 연애 스킬을 내가 꼭 보고야 만다!
J와의 만남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자신을 위해 취향에 맞는 책을 골라주는 사람을 만나 감사하다는 그녀의 말에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그녀가 책과 친해지면 다음 만남에는 재미난 책을 선물하겠다고 약속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과 책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만나면 시너지가 배가 되는 것 아니겠나. 책과 천천히 친해질 수 있도록 J가 좋아할 법한 책들을 선별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회사가 만들어준 인연으로 귀한 사람을 얻었다. 내향적이라는 핑계로 스스로를 가두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했던 과거의 나와 서서히 이별하는 중이다. 불금을 함께 보낸 것도, 세 달 뒤 사당에서 만나 맛집 투어를 하기로 한 것도 나와 J, 우리의 의지였다.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 좋은 사람과의 만남을 반기는 사람이 되었다. 옆 회사 동료인 J를 비롯해 고객사 담당자였던 언니 H, 불오징어 멤버들까지 회사에서 좋은 친구들을 잔뜩 얻었다.
결이 맞는 사람과의 연은 억지로 무언가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이어진다는 것을 알아가는 중이다. 관계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인연을 만들어주는 비결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친구가 없어 외롭다 투정 부리던 못난이는 한 뼘 자라났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스스로의 부족한 면만 바라보던 편향된 시선을 내려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아껴주려 노력하고 있다. 나를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워가는 중이다. 서툴지만 천천히, 나를 더 사랑할 날들을 살아낼 나에게 말하고 싶다. 잘하고 있다고. 잘 해낼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