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년차 직장인의 퇴사 에세이
작년 5월, 회사가 강남에서 구로로 이전했다.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이미 확정된 사안이었다. 강남의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내린 결정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대표가 5개의 회사를 운영하는 회사 수집가라는 사실이었다. 그 덕에 우리는 거리로 나앉지 않고, 구로에 있던 다른 회사의 사무실을 나누어 쓰게 되었다. 말이 좋아 나눠쓰는 거지 눈칫밥을 먹게 되었다는 소리다.
갑작스러운 이전 소식에 직원들의 퇴사 러쉬가 예상되었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구로에서 업무를 진행해 보고 거취를 결정하겠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IT 업계의 칼바람이 부는 시기라 그랬을 테다. 몇몇은 출퇴근 거리를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대부분 회사에 남았다. '구로로 이전을 하는데도 이 정도로 그만두는 직원들이 없다고?' 서로를 신기해하면서. 공유오피스에서 근무하며 자유롭게 일하던 우리는 강남의 호시절을 추억하며 구로로 떠나왔다. 이만원이던 점심 식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구로에서의 더부살이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나와 함께 일하던 P팀 직원은 7명이었다.
강남역에 있을 당시 회사가 쓰던 공유 오피스는 여섯 개였는데, 그중 하나의 사무실을 함께 쓰던 이들이다. P팀의 운영 관리, 개발자, 디자이너로 구성된 우리 방은 매일 음악 선율이 흘렀다. P팀의 백엔드 개발자인 K는 스포티파이에서 그날의 음악을 선곡해 주었고, 우리는 군말 없이 그의 음악 취향을 공유했다. 6시 정각이 시간이 되면 '퇴근하고 싶다' 가사가 반복되는 중독성 강한 퇴근송을 들으며 인사를 나눴다.
원하면 언제든 다른 층에서 근무를 할 수도 있었다. 반쯤 누울 수 있는 리클라이너 의자가 준비되어 있는 2층 공용 공간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업무에 집중하고 싶을 때면 노트북을 들고 적막한 3층 공간으로 숨어들면 그만이었다.
직원들이 환호하던 복지는 점심 식대였다.
점심 식대가 이만원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강남역의 모든 맛집을 섭렵할 수 있었다. 강남역에 유명한 돈가스 집이 오픈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주변에 소문이 채 돌기도 전에 먼저 찾아갔다. 그렇게 오제제 등심돈가스를 먹고 쉐이크쉑에서 밀크쉐이크 쉑버거 찍먹을 즐겼다.
우리의 최애 단골집은 회사에서 도보 3분 거리의 연어 솥밥이었는데, 두툼한 연어를 배불리 내어주는 곳이었다. 평균 가격대가 만 팔천원이라 내돈내산하기 어려운 곳이었음에도 회사 덕분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방문하고는 했다. 음식이 나오면 회사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기도하자는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구로디지털단지로의 이전은 식대도, 퇴근송도, 사람들과의 유대도 앗아갔다.
타 회사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무실 생활이 편할리 없었다. 삭막한 사무실 풍경에 삼삼오오 공용 공간에 모여들었다. '사무실이 너무 조용해서 입을 못 열겠어요.'라던가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없으니 일하기가 불편해요.' 등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 말을 나누는 것조차 불편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슬랙에 공지가 올라왔다. 업무 시간 중에는 공용 공간을 사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개인적인 용무로 자리를 15분 이상 비우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배탈 나면 어쩌냐'라며 멋쩍게 웃어 보였지만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다. 까라면 까야지. 여기는 회사니까.
스포티파이 음악 선곡을 도맡던 K는 퇴사 꿈나무였다.
회사 가까이 살고 싶어 강남역에 오피스텔을 얻었다가 졸지에 구로로 출퇴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입만 열면 '퇴근하고 싶다'가 아닌 '퇴사하고 싶다' 노래를 불러댔다.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오려면 지하철을 두서너 번 갈아타야 했던 L도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선수치는 바람에 눌러앉게 되었지만. 조직 문화에 대한 직언이 쏟아졌지만 회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HR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고 직원들은 방치되었다.
어느 틈엔가 하나 둘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균열이 시작된 것이다. 매달 퇴사하는 직원들이 생겨났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그간의 고생을 치하했다. 회사는 알아주지 않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사이였으니까.
회사 상황이 어려운 탓에 임금은 동결되었고, 직원들의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먼저 퇴사하는 사람이 승리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직원들의 이직이 잦아지자 회사는 동종 업계 이직 금지 서약서를 들이밀었다. 보여주기 식의 서류 상의 제재일 뿐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떻게든 발목 잡고 싶은 회사와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나 또한 건강을 핑계로 퇴사 엔딩을 맞았다. 그렇게 공유오피스를 함께 쓰던 7명의 동료 가운데 세번째 퇴사자가 되었다. 초급 개발자로 일하던 H는 대학원을 진학했고, 디자이너 L은 미국으로 떠났다. 세상은 넓고, 기회는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므로.
내 회사인 양 주말도 없이 일하던 때가 있었다. P팀을 꾸리고 운영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이 내가 이겨낼 몫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더니. 미운 정이 잔뜩 들어버린 회사에 등 돌리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다. 동종업계에서 러브콜이 왔을 때도 P팀을 두고 가는 게 맞는지를 고민하다 남기를 택했다. 견디면 좋은 날이 온다고 굳건히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결국 그날은 오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서 제3자의 시선으로 보아야 제대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 42개월 동안 품고 있던 회사에서 멀어지니 더 투명해진다. 견디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인생은 타이밍이고, 그 순간을 결정하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