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걱정해서 무엇하나?
일단 마음먹은 일을 행동에 옮기면, 그 일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담장 구멍을 통해 보이는 삶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데 망설임이 없어졌다. 이제 이 깨달음은 내 인생의 철학이 되었다. (존 스트레레키, '세상 끝의 카페' 중)
그래.
주저하지 말자,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세상 물정에 흠뻑 젖는 것을 망설이지 말자. 희망에 젖으면 미래가 두렵지 않고, 사랑에 젖으면 사랑이 두렵지 않고, 일에 젖으면 일이 두렵지 않다고 누가 그랬다. 두려움이 있다는 건 나를 그곳에 던지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걱정의 문 앞에서 망설이기만 하는 거라고. 그렇다. 처음에는 비에 몸이 젖을까 두려워 피하지만, 온몸이 다 젖으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부끄럽다. 두려움을 두려워만 했지 온전히 나를 던져 보지는 않았다. 일을 겁내 피하면 피할수록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이별이 두려워 사랑하지 않는다는 변명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래 일단 뛰어드는 거다. 젖을까 봐 두려워 하기보다 빗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 조금씩 그쪽으로 다가가 흠뻑 젖어 보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것이다.
사람은,
몸으로 걱정을 한다고 한다. 사람은 마음으로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과 폐와 같은 장기로도 걱정을 한다는 글을 읽었다. 따라서 걱정은 우리 신체의 세포와 조직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하긴, 걱정하느라 뜬 눈으로 새운 밤이면 하루종일 정신이 몽롱하고 삭신이 다 쑤시곤 했었다. '걱정'에 대하여 그 뿌리 끝까지 파고들어 본 적이 있다. 당연히 오지 않는 잠, 구걸하지 않고 이 악물고 사흘 밤낮을 고민만 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번뇌의 밤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어이없게도 나만의 걱정이었을 뿐, 사실은 전혀 걱정거리가 아니었다는. 결론은 걱정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굳이 한다면 10분 이상 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불필요한 일로 두통을 동반하는 것 외에 내장기관들까지 아프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걱정은 감기와 같다. 약을 먹든 먹지 않든 감기는 낫는다.
나를
걱정해 주는 존재도 소중하지만, 나에게 걱정을 끼치는 존재도 소중한 것이다. 어느 집이나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한 사람(대부분 막내)이 있을 것이다. 성치 않은 몸으로 힘들게 살고 있을, 그럼에도 애물단지에다 막내티를 벗지 못한 나이 지긋한 동생이 내게도 있다. 사람들은 걱정을 끼치는 사람보다 걱정해 주는 사람을 더 가까이하려 한다. 나도 그랬던 것 같고. 하지만 누군가를 신경 쓴다는 건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언제나 구차한 변명은 사는 게 바빠 너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말. 힘들어서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서 힘들어진 일이고, 닫혀서 찾지 않는 곳은 사실은 찾지 않아서 닫힌 곳이다. 그러므로 동생에 대한 나의 변명은 구차할 수밖에 없다. 여유를 갖기 원한다면 여유 있는 행동을 하자. 내게 걱정을 끼치는 존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신경 써 주며 살다 보면 여유를 느끼게 될 거라 확신한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걱정을 끼칠 때보다, 누군가를 걱정해 줄 때 행복을 느끼는 법이다. 서로 생각한다는 말은 서로에게 걱정을 끼친다는 말이니까. 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딸 그림, 걱정의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