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지 말자.
말투란 말을 담는 그릇이다. 물을 어떤 모양의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세숫물로 보이기도 하고 먹는 물로 보이기도 하듯 말투는 그 나름대로 독립된 의미를 지닌다. (이정숙, '유쾌한 대화법' 중)
때로는,
내용보다 형식이 일을 결정짓기도 한다. '그릇되다'란 말이 있다. '그릇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커서 큰 그릇이 될 놈이라고 머리를 쓰다듬던 어른도 있었지만,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어떤 일이 사리에 맞지 아니하다, 어떤 일이나 형편이 잘못되다, 어떤 상태나 조건이 좋지 아니하다. 뭐 이런 뜻이다. 그런데 왜 그릇이 되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는 걸까. 무어라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인데. 물론 '그릇'이 명사가 아니라 부사로 쓰여서 그런 줄은 알지만, 같은 낱말이 아닌가. 아마도, 의도는 맑은 물을 주는 것인데, 사람들은 물이 담긴 그릇을 보고 오해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떤 물이냐가 아니라, 어떤 그릇에 담아 주느냐에 따라 판단하는 잘못된 행태를 '그릇되었다.'라고 하는 게 아닐까.
물론,
맑은 물이라면 투명한 유리컵에 담아 줄 때 받는 사람의 기분도 상쾌할 것이다. 좋은 음식이라면 크고 넓은 접시에 푸짐하게 담아내야 사람들은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그릇에 대한 예의와 형식은 지켜야 하겠지만, 목마른 나그네가 시원한 우물물이면 되었지 두레박인들 어떻고 뚝배기면 어떤가. 우아한 크리스털 컵 구해 오는 동안 목말라 죽겠다. 그릇이 아무리 귀한들 담긴 물보다 못하고, 그릇이 아무리 크다 한들 세상 물을 다 담을 수 없다. 형식, 포장, 명예, 겉모습, 스펙... 등등. 모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그릇'들이다. 이런 그릇들로 사는 것을 '그릇되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