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무지 심심하고 싶다.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는 꿈이 아니라 심심함의 세계이다. 심심함을 견디기 위한 기술이 많아질수록 잃어가는 것이 많아진다. 심심함은 물리치거나 견디는 게 아니다. 환대하거나 누려야 하는 것이다.
(김소연, '시옷의 세계' 중)
음,
먼저 '심심함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심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심심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을 검색하면 이렇게 나온다.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 '음식 맛이 조금 싱겁다.' 그렇지만 어떤 정의도 '심심함의 세계'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하는 일이 없다고 지루할까? 재미가 없을까? 나는 하는 일이 없어도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마음 표현이 매우 깊고 간절하다? 그렇게 간절하고 사려 깊은 마음으로 사는 것은 심심함의 세계와 부합하지 않는다. 음식 맛이 싱겁기만 한 것은 더욱 아니고.
결국,
내 멋대로 '심심하다'의 정의를 하나 추가할까 한다. 心心하다. 마음(心)과 마음(心), 즉 마음이 많이 있다는 뜻이다. 무슨 마음이? 마음 가는 데로, 하고 싶은 데로, 마음껏 하려는 자유로운 마음과 여유로운 마음을 말한다. 심심함의 세계는 그런 마음들이 존재하는 시공간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꿈꾸는 이상향이지만, 특히 중년을 넘긴 갱년기 사람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나 역시 틈만 나면 심심함의 세계에 들어가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지내다 오곤 한다. 나의 경우에는 주거지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100평 규모의 텃밭을 마련했다. 언제든 훌쩍 달려가 심심함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포털 같은 곳이다.
내가
좋아하고 자주 머무는 심심함의 세계는, 뭐 이런 것이다. 절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스테판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 같은 분위기에서 낮잠을 잔다거나 하는 사소한 것들이다.
포도나무 밭 들마루에 누워 부르게 점심 먹고 난 후, 보랏빛 포도 껍질 하나 들어 눈 가리다가, 가물가물 보라색 하늘 눈이 부셔 스르륵 낮잠에 들고. 언듯 개 짖는 소리 들려 눈 뜬 저녁, 눈 비비며 차려진 밥상 곁으로 슬금슬금 게으른 평화가 기어들고.
무슨 요일인지 중요하지 않은 게으른 날에, 베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때문에 졸다가, 소파에서 거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TV 리모컨. 다 못 먹고 옆으로 밀어 놓은 수박 반 덩이와 엎어진 숟가락. 게으름, 느림, 버림, 미룸. 'ㄹ'과 'ㅁ'의 조합으로 끝나는 단어를 떠올리며 시시덕거리는 오후.
이런
게으른 광경들이 펼쳐지는 곳이다. 심심함의 세계는 바쁜 나를 버리고 게으른 나를 드러내는 곳이다. 아무도 쫓아오는 이 없는데, 놀란 고라니처럼 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곳이다. 인생은 선착순이 아닌데, 사람들 제쳐가며 전력 질주하고 있는 모습을 깨닫는 곳이다. 인생의 오르막을 지나 내리막 길을 가는 사람은 특히 감속에 신경 써야 하는 법이다. 자 우리 더 늦기 전에 심심함의 세계를 찾아 나서자. 나무 어둠 속 그물 짜는 거미, 가슴을 때리는 한 구절, 혀에 감기는 차의 감촉 등 잊고 있었던 삶의 미각들을 하나하나 되찾는 시간을 갖자. 그리고 우리 느리게 살자. 좀 심심하게 살자.
를 지나면 심심함의 세계로 가는 포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