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 생각해 보면 다른 풍경이기에 멋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났을 때, 서로가 지니고 있는 다른 풍경에 끌리는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중)
우리는 각자,
다른 풍경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곳을 보고 있어도 서로의 풍경이 다르다. 자기만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창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고 자라면서 보아왔던 풍경들을 통해 자기만의 창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두 물체는 동시에 같은 장소를 차지할 수 없는 것처럼, 두 사람 역시 동시에 같은 풍경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견해는 나와 같지 않음이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는 대립하고 반목한다. 내가 남과 다르고, 남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관계가 출발한다. 극이 다른 자석끼리 뭉치듯. 그러니 내가 가진 창문의 견고함을 자랑하지도, 단열과 방음의 우수성을 자랑하지도 말자. 그건 외부와의 '밀폐'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보다는 유연한 프레임을 갖기로 하자.
어쩌면,
창문이 두려워하는 건 똑같은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처음 창문과 창문으로 만났을 때, 서로의 풍경을 기웃거리며 어떤 창문인지를 궁금해했었다. 어떨 땐 똑같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풍경에 까르르 놀라기도 했다. 어떨 땐 완전히 다른 풍경을 이야기하는 그 사람이 낯설기도 했다. 아내의 창문을 볼 때마다, 아들의 창문을 볼 때마다, 그리고 딸의 창문에 비치는 그림 같은 풍경을 볼 때마다 놀라곤 했다.
흠이 아니라 매력이라고 했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다는 것은.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더 살 만한 세상일 수 있는 것이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오늘도 며칠 전과 사뭇 다르다. 그러니 날마다 다른 마음으로 살아 볼 필요도 있겠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다양성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이승헌 작가가 그랬다. 큰 꽃은 단지 클 뿐이고, 작은 꽃은 단지 작을 뿐이다. 오래 피어 있는 꽃은 오래 피어 있을 뿐이고, 일찍 지는 꽃은 일찍 질뿐이다. 그것은 차이이고 다양성일 뿐, 우열이 아니라고.
나이를 먹는다는 건,
몸에 세월이 축적된다는 것이고, 안부를 물어야 할 만남을 많이 가졌다는 것이다. 너무 많아서 소홀한 거라고 말하지 말자. 어른이라면 그래야 하니까. '어른'이란 상대방의 안부를 물어주는 관심이 습관으로 쌓여 있는 사람이니까. 그동안 내가 만났던 소중한 창문들을 떠올리며, 차근차근 그들의 안부를 묻기로 했다. 그때 서로 다른 풍경으로 마음 상하지 않았는지. 그랬다면 미안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