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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씀 Dec 26. 2022

쌀을 씻으며

# 냄새로 앓는 그리움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사람은 그리움을 남긴 사람. 눈을 뜨고도 생각나는 사람은 아픔을 남긴 사람. 얼굴이 먼저 떠 오르면 보고 싶은 사람이고, 이름이 먼저 떠 오르면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공병각, '잘 지내니? 한때 나의 전부였던 사람' 중) 



자발적 유배지, 


남도의 단아한 벽돌집 관사에서 홀로 일어나 쌀을 씻다가, 있어야 할 사람의 차가운 부재를 손 끝으로 느낀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남편들이 가장 많이 느끼는 환상은, 퇴근 후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왔는데, 부엌에서 아내가 만드는 음식 냄새가 나는 것이라 한다. 아내와 잠시 떨어져, 설익은 밥을 그릇에 퍼담다가, 이 솜씨로 아내의 요리를 품평했던 일이 부끄러워졌다. 눈으로 앓는 그리움보다 더 지독한 것이 냄새로 앓는 그리움이다. 거기에 맞지 않는 음정으로 흥얼거리는 그리운 노랫소리까지 더해지면, 그리움은 아픔이 된다. 그 사람의 부재를 견디는 이 시간이 우리의 존재에 얼마나 큰 힘이 될 것인지, 나는 안다. 그 사람 역시 같은 이유로 나의 부재를 견디고 있다는 것을.



처음,


여기 내려올 때는 홀로 자유만 누릴 생각이었으나, 보름이 넘어가자 비로소 알게 되었다. 먹는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왜 먹어야 할 시간은 그리도 빨리 돌아오는 것인지. 살기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하는 일은 녹록지 않은 일이었음을. 더구나 나 먹을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먹이려는 수고는, 그보다 몇 곱절 더 힘든 일이었음을. 


마더 테레사가 그랬다. 빵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빵에 담긴 사랑이 사람을 살린다고. 그렇다. 밥이 아니라 밥에 들어간 사랑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빵이나 밥의 영양분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 사랑이 들어 있지 않으면, 마음이 허기져 사람은 살지 못한다. 화가 나 폭식을 해보지만 여전히 배고픈 것도, 실은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픈 것이다. 출장길에 아무리 좋은 음식을 사 먹어도 헛헛했던 이유도 그런 까닭이리라. 맛의 유무를 떠나, 나를 생각하며 아내가 만들어 준 음식에는 사랑과 정성과 바람이라는 영양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긴급 상황이다. 


쌀도 있고 라면도 있고 계란도 있으나, 아내의 사랑과 정성과 바람이 들어있는 반찬이 떨어졌다. 혼자 쌀을 씻어 밥은 지었는데, 그 속에는 사랑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 사람의 생존이 위협받는 심각한 상황이다. 이것은 분명 재난 상황이다. 구조 요청을 보낼까?





홀로 일어나 쌀을 씻으며 아내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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