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세종도서관 야경
책을 읽기는 하는데, 영화도 보기는 하는데 내용은 도무지 기억을 못 하겠다면서 자기 기억력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묻곤 합니다. 콩나물이 제가 자라면서 마신 물을 기억하겠느냐고요... 물을 기억하지 못해서 콩나물이 자라지 못하더냐구요... 콩나물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콩이라는 씨앗의 소양 위에 이루어진 물의 퇴적이 아니겠느냐고요... (이윤기, '어른의 학교' 중)
책에서 읽는 것
비록 기억을 끄집어내어 얘기하진 않지만, 정말 많은 양의 지식을 물처럼 머금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앎의 무게 때문에 얼핏 의심이 들다가도 문득문득 던지는 한마디에 놀라게 되는 사람. 콩나물처럼 물의 정수만 흡수하여 세포질을 구성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나는 부럽다. 폭은 넓지만 얄팍한 지식을 자랑하거나, 깊이는 있지만 편협된 시야로 폼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 본다. 사람들은 도대체 책에서 무엇을 읽는 것일까. 책을 읽을 때 바보는 자기가 아는 것만을 읽고, 보통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읽고, 천재는 쓰지 않은 글까지 읽는다고 했다. 나는 활자들이 품고 있는 지식이 아니라, 책 속에 스며 있는 작가의 마음을 읽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차마 적지 못한 글과 차마 말하지 못한 말을 마음으로 읽어 내는 것이 독서일 거라고. 살다가 마음이 흔들리거나 약해질 때, 그 작가들의 마음이 내 안에 버티고 서서 나를 도와주는 거라고.
빼앗아 읽는 책
장정일 감독은 '두 번 본 것'만이 영화이고, 한 번 보고 만 것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목격하게 된 교통사고와 같은 거라고 했다. 나는 책도 사람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용이 어떠하든 잊을 만하면 다시 생각나 펼쳐 들어야 하는 책이나, 다시 연락해 만나야만 하는 사람만이 커피처럼 중독의 향을 품고 있는 거라고. 그런 책과 사람을 많이 접한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살고 있는 거라고.
아내가 읽고 있는 걸 빼앗아 읽고 있는 책, 장석주 작가의 '그 많은 느림은 다 어디로 갔을까'란 책이 그런 책이다. 자꾸만 느림을 떠올리게 하고, 기어이 책을 펼치게 만든다.
'느림'이란 무엇일까? 머물러 있는 경지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게 느림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빠르지 않은 것은 도태된다고 배운다. 느린 것은 태만이며 질병이라고 배운다. 문명의 훈육에 따라 하늘에서 타고난 바 우리 안의 리듬인 느림을 부정하고 느림을 박멸한다. 느림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의 본성을 거스르는 짓이다.
정말로 과거에 그 많던 느림은 다 어디로 갔을까? 컴퓨터와 인터넷의 출현으로 일을 빨리 끝낼 수 있게 되었는데, 일 끝내고 남는 시간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왜 일을 빨리 끝낸 사람에게 그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걸까? 세상이 빨라지면 질수록 느림도 많아져야 하는 것 아닌가?
내리막길이 되어서야 한 권의 책을 통해 사색을 한다. 쫓기듯 살고 있는 한심한 내 모습을 돌아보고, 그랬구나. 아무것도 쫓아오는 것도 없는데 놀란 고라니처럼 달아나고 있었구나. 인생은 선착순이 아닌데 다른 사람들 제쳐가며 전력질주만 했었구나. 그물 짜는 거미, 가슴을 때리는 한 구절, 혀에 감기는 차의 감촉. 잊고 있었던 삶의 미각을 하나하나 되찾아가며 살자. 인생의 내리막 길에서는 감속에 특히 신경 써야 하는 법이다.
책들이 사는 집
한결같은 존재는 부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할 땐 사랑을 모르고, 이별할 때는 이별을 모르는 것이다. 책을 펼쳐서 호숫가 옆에 던져 놓은 듯한 모양이라는 국립세종도서관. 책들이 사는 집이다. 세종에 내려온 지 오래되었건만, 나는 밤 10시에 도서관 불이 꺼지고 모든 책들이 잠을 잔다는 것을 사진을 찍으러 가서야 알게 되었다. 마침내 불이 꺼지고 나서야 그 모습이 아름다웠구나 깨닫게 되었다. 드리운 불빛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가 만난 사람은 모두가 아름다운 것처럼. 아 하나같이 빛나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절대 소홀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