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속내
# 가만히 들여다 보기
그거 약 먹어도 소용없어요. 화가 나면 화를 내고 말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끙끙 앓지 말구요. 마음속에 원하는 일을 안 하고 가슴으로만 삭히려 드니까 가슴이 아픈 거예요. (신경숙, '깊은 슬픔' 중)
우울은 자신에 대한 분노
우울이란 흔히 생각하듯 만사가 귀찮고 울적한 상태가 아니라 마음에 화가 가득 찬 상태이다. 근심과 답답함을 가눌 길 없어, 도피하려는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즉 우울한 사람은 분노하고 있는 것이며, 그 분노가 자신을 향할 때 우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울에서 빠져나오려면 분노의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 anger(분노)는 danger(위험)에서 d를 뺀 것이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분노는 다스리지 않으면 위험하다. 분노는 심신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독이기 때문이다. 독은 남에게 뱉어서도, 그렇다고 묵묵히 삼켜서도 안 되는 것이다. 해독하거나 중화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분노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분노는 아픔의 전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은데 못할 때 아프다. 무엇을 해야만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거나 할 수 없을 때 아프다. 특히 어쩔 수 없었던 아픔보다, 어쩔 수 있었던 아픔이 더 아프다. 그리고 그 아픔을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아픔이 분노로 전이하는 것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는 이문재 시인의 '농담'이란 시의 마지막 구절을 알 것이다. 그래 농담이다. 아프면서까지 종소리를 멀리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시인의 말을 농담으로 알아듣지 못하고, 진짜로 참고 또 참다가 결국 침몰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곧고 멀리 가기 위해 아파하는 거라고 변명하는 사람, 바로 우리 같은 사람이었다.
아픔은 가까운 곳에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한 물속으로 가라앉는 경험,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인연의 붉은 실에 칭칭 감겨 어쩌지도 못하고, 결국은 나를 속박하는 인연들. 그래 나를 구속하는 건 언제나 가까운 사람들이다. 살면서 큰 기쁨도, 큰 아픔도,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이 주는 것이다. 나를 세우는 것도, 무너뜨리는 것도 결국 그들이다. 사람들은 그의 주변 사람이 하는 평가를 신뢰한다. 오랜 시간 같이 지낸 사람의 평가는 그러지 못한 사람의 평가에 비해 더 설득력이 더 있기 때문이다. 겪어본 사람이 가장 잘 알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곁에 있는 사람의 존재에 대하여 공기처럼 무감각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건데도.
아파하지 말자
우리는 잘못하거나 모자람이 없는데도 응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 그래서 속이 상할 때 아프다. 가까운, 가깝다고 믿었던 이에게 상처받을 때, 그 상처가 아무리 작아도 아픔을 크게 느낀다. 누군가 나보다 잘난 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보다 못난 점에 대하여 항변하고 싶을 때도 그러하다. 어떤 이는 높은 음악을 들으며 분노를 태운다고 하고, 어떤 이는 낮은 음악을 들으며 분노를 가라앉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속에 공간이 있을 때 얘기다. 온 마음이 아픔과 화로 가득 차 있으면 어떤 음악도 내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 아픔이 화로 진행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아픔이 분노로 전이되지 않도록 차단해야 한다.
상처에 손대지 말자
살다 보면 야속하고, 얄밉고, 마주치기도 싫은 사람이 흙물처럼 떠 오를 때가 있다. 한 때는 좋은 관계로 너무나 가까운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상처로만 기억되는. 그럴 때 속상해하거나 아파하지 말자. 아프더라도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말자. 마음은 우물과 같아서 가만히 기다리면 혼탁했던 물이 맑아진다고 했다. 휘젓지 않고 가만히 나무토막처럼 기다리면 차차 맑아진다. 아픈 상처는 손대지 않으면 저절로 아무는 것이다.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덧나서 아픈 것이다. 분노가 사그라들고, 아픔이 가라앉고, 상처가 깨끗해지도록, 힘들지만 가만히 기다려 주기로 하자. 그렇게 맑아진 마음으로 또 하루를 살기로 하자.
'높은 습도'와 '깊은 슬픔'은 우울의 농도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