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화해변에서
정말이지 나는 바다에 가서 울고 싶었다. 푸른 바다를 보며 실컷 울어야 눈물의 원이 없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바다에 갔을 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든 것처럼 마음이 편해서 그냥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너 이번엔 초췌해져서 왔구나. 세상살이가 고단하지? 그래, 그래, 너 말 안 해도 내가 다 안다. 인생은 그런 거야. 이 세상을 다녀가는 사람치고 슬픔이 없었던 사람은 없어. 우리 바다는 원래 세상 사람들의 눈물로 이루어진 거야.'
(정채봉, '눈을 감고 보는 길' 중)
바닷물은 왜 짠가
볼테르는 눈물이 슬픔의 말 없는 말이라고 했다. 정말로 슬픔이 사무칠 때는 말은 흐르지 않고 눈물만 줄줄 흘렀다. 그리고 그 눈물의 방향은 본능적으로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바다로 가서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겨울의 바다를 찾아가 허기질 때까지 울고 나서야 속이 후련해졌다. 그랬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속에 있던 슬픔의 응어리들을 바다에 투기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바다가 세상 사람들의 눈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바닷물이 짠 이유도 설명이 된다. 소금처럼 강한 짠맛이 아니라 뭉클하면서 짭조름한 맛이 틀림없는 눈물의 맛이다. 동화처럼 소금 맷돌이 바닷속 어딘가에서 계속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니 우리, 가끔 세상살이 고단해지면 바다를 다녀오자. 굳이 나의 눈물을 바다에 보태지 않더라도, 눈물의 파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 눈물은 눈물에게서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 바다 주마
바다는 마음이고, 파도는 감정이다. 우리는 마음이 슬프고 아픈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건 마음의 물결일 뿐이다. 단지 파도에 지나지 않는 감정인 것이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그런 감정들은 파도처럼 왔다가 갔다가 하는 것이다. 감정이란 나의 상태를 누가 알아 달라는 의사표시이다. 따라서 누가 그걸 알아주기만 하면 감정은 파도처럼 소멸한다. '지금 화가 났구나. 많이 속상하겠다.' 이렇게 마음의 상태를 인정해 주는 순간, 감정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파도의 포말처럼 사그라들고 만다. 그러므로 내가 바다의 마음을 갖고 있다면, 파도가 아무리 요동친들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 바다의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자.
어느 시인은 바다가 '바라다'의 준말이라고 했다. 그 말처럼 진심을 다해 바다처럼 살기를 바라면, 바다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오늘부터 나는 바다다. 나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다, 바다처럼 깊다. 그딴 슬픔이야 다 받아낼 수 있는 바다다. 기꺼이 받아주마, 다 바. 다. 주.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