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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씀 Apr 28. 2023

옴니버스 커피

# 커피가 타고 있는 버스, omniBUS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는 선율처럼 따뜻했다. 내가 그 조그만 세계를 음미할 때 풍경은 나를 축복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내 커피 잔 속에 위안이 있다. (빌리 조엘)


커피가 타고 있는 버스, 옴니버스(Omnibus)


사람이나 글은 커피처럼 중독향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이참에 모두를 커피에 중독시켜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커피를 넣고 쓴 글들을 한데 모아 보았습니다. ^^




1. 커피의 눈물


커피가 흘린 눈물을 유리병에 담아 선물하고 있지요, 혹시 하나 드릴까요?


여느 유배생활이 다 그렇겠지만 은둔해 보니 알겠다. 모여 있다 흩어진 삶은 여백이 차고 넘친다는 것을. 흘러간 사진들을 늘어놓을 마음의 방바닥이 생겼다는 말이다. 이런 마음의 여백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마음에 여백이 생기면 이것저것 무얼 하고 싶어 진다. 그리고 실제로 무얼 하게 된다. 맨 처음 내가 한 일은 커피의 눈물을 모으는 일이었다. 커피를 내린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커피가 흘리는 차가운 눈물을 모아 더치커피를 만드는 일이었다.


또르륵. 똑. 또르륵. 똑. 똑.


사진처럼 선명한 과거의 알갱이들이 복기하는 바둑알이 되어, 내 사무실 냉장고 안에서 콜드 브루(cold brew) 되고 있었다. 그동안 살았던 세월의 원두를 핸드드립 때보다 조금 더 곱게 갈아서, 반성의 찬물을 머리맡에 담아 두면 한 방울 한 방울, 살아오면서 흘렸던 눈물들이 차갑고 냉정하게 우려지게 되는 것이다. 300ml 유리병 가득 눈물이 채워지면, 딸이 그려준 캐리커쳐를 넣은 상표 스티커를 부착하고 딱 맞는 상자에 넣어 포장한다. 그러고 나서 아쉬운 듯 상자 안에 이런 쪽지를 적어 동봉하면 끝이다. 커피의 눈물을 모으는 일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추신> '아아'로 만들어 마셔도 좋아요~





2. 따뜻한 커피의 비밀


추운 겨울날, 아무리 뜨거운 커피도 핫하진 않았다.


추운 날 아침, 면접시험장 앞에서 선배들이 보온병에서 따라 주던 따뜻한 커피를 기억한다. 그런 따뜻한 시절이 있었다. 후배들의 합격을 염원하는, 뜨거운 정이 담긴 커피 한 잔이, 힘이 되고 긴장을 녹여 주었다. 선배들의 사랑이 커피에 들어 있어, 합격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름 과학적 근거가 있었다.

 

사이언스지에 실린 미국 예일대 존 바흐 교수의 실험에 따르면, 첫인상을 좌우하는 것은 사람의 신체 컨디션이라고 한다. 특히 손 온도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면 좋은 인상을 주고, 차갑게 만들면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준다는 결론을 도출했다고 한다. 같은 사람에게 면접 10분 전 따뜻한 커피를 손에 들고 있게 하였더니, 성실하고 관대해 보인다는 좋은 인상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반대로 차가운 커피를 손에 들고 있게 하였더니, 이기적이고 예민해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 혹시 면접이나 미팅을 앞두고 있다면, 반드시 따뜻한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있으라 조언한다. 물론 뜨거운 열정을 함께 품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3.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


아포가토(Affogato) 중독에서 벗어나기가 왜 그리 힘들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 커피의 정체에 대하여는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보다가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타 준 커피가 더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헬싱키를 배경으로 2006년에 만들어진 일본 영화.


"누군가 당신만을 위해 끓여 주면 더욱 맛이 진하죠."


어느 날 중년 남자가 주문한 커피를 마시더니, 더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비법을 일러 준다. 그는 드립퍼에 커피를 세 스푼 넣고 검지 손가락을 커피에 찌르고는 주문을 외웠다. "코피 루왁!" 여주인공 사치에도 똑같이 하고 주문을 외우지만, 중년 남자는 입이 아니라, 가슴으로 외워야 한다고 알려준다. 그렇게 만든 커피를 미도리에게 타 주자, 원두를 바꿨냐며 커피맛이 달라졌다 말한다.


사람의 혀는 음식물의 성분뿐만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정성과 마음까지 식별한다. '코피 루왁!'이라는 주문 때문이 아니라, 더 맛있는 커피를 손님에게 대접하겠다는 여주인의 마음이, 주문과 함께 섞여 들어가 맛있어진 거라 생각한다. 꿀꿀한 아침, 누가 주문을 외우며 타주는 커피 한 잔이 그립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 말이다.





4.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어 죽어도 '아아'라더니 아름다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 녀석은 자본주의의 변이다. 자고로 식은 커피는 굳은 찬밥과 함께 초라하고 쓸쓸한 것인데, 왜 뜨거운 커피보다 식은 커피가 더 비싼 것일까? 얼음을 넣어 차갑게 식힌 커피 말이다.


고속도로 휴게소 커피점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의문에 잠겼다. 늦은 밤 기다리던 아내 손에 쥐어준 병에 든 커피도 주머니 속에서 오래도록 데워 낸 커피였고, 추운 날씨가 아닌데도 떨고 있는 시험장 앞에서 선배들이 타 준 커피도 따뜻한 커피였는데... 그 시절 커피는 뭉클한 가슴 맛이 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 들고 달궈진 차 문을 여는 순간, 훅- 뜨거운 열기가 나를 덮친다. 헉 그렇구나. 그동안 숨 막히게, 숨 가쁘게 살고 있었구나. 전력질주를 계속하느라 뜨거워진 심장을 좀 식혀야 하겠구나. 빌딩 앞에서 아이스커피를 연신 가슴과 볼에 갖다 대던 신입사원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식은 눈물 맛이 났다.





5. 커피 나오셨습니다


한껏 치장한 차림으로 커피 부인께서 나오셨다.


그 사물들에게 우리는 존경의 마음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커피가 제 시급보다 더 비싸거든요. (한글문화연대 제작 영상, '커피 나오셨습니다' 중)


가장 비싼 커피, 루왁커피(Kopi luwak)는 한 잔에 7~8만 원. 제법 이름 있는 척하는 아메리카노는 5~6천 원. 2014년 현재 최저임금은 시간급으로 5,023원. 그럼에도 나는 오늘, 커피님께서 친히 테이블까지 납시는데, 영접도 아니하고 불경스럽게 앉아서 기다렸다. 더구나 그 고귀하신 커피님을 불 꺼진 골방 같이 차가운 아이스크림 위로 쏟아 붓기까지 했으니. 그것도 분수에 맞게 300~500원 하는 자판기 커피 찾지 아니하고, 대궐처럼 꾸민 커피님 댁에서 그랬으니. '커피 나오셨습니다.'는 말에 죄인처럼 고개 숙이다. 그리고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것을 값이 비싸서 살 수 없는 현상을 떠올리다. 부디 사람끼리 존경하며 살자.


   * 2023년 최저시급은 9,620원이다.





6. 커피는 여유다


여유는 능동적인 선택이라고 쓰여 있었다.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커피의 향이나 맛 때문이 아니다. 나는 커피를 마심으로써 갖게 되는 여유로운 시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유는 여유 있을 때 찾는 것이 아니라 여유가 없을 때 찾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먼저 찾게 된다. 여유도 마찬가지다. 여유나 쉼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선택에 의해 쟁취하는 것이다. 너무나 분주하여 쉴 여유가 없을 때, 누가 가져다주는 커피 한 잔은 사실 커피가 아니라, 마시며 쉬라는 여유가 내린 명령이다. 보다 못한 동료가 배려해 준 여유를 마시는 것이다.





7. 좋아하는 커피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가 나를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커피와 정치는 한 번 중독되면 끊기 어렵다고 한다. 중독된 것처럼 좋아하는 커피는 어떤 커피일까? 거품이 좋은 카푸치노? 양은 작지만 당찬 에스프레소? 보통사람들이 많이 찾는 아메리카노? 순백의 우유를 첨가한 카페라테? 아니면... 논두렁에서 새참 먹고 들이키던 그리운 사발 커피? 읍내 종점다방 미스킴이 가져온 시커먼 원두커피? 커피 취향은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고, 그날 기분에 따라 다르므로 콕 집어 말하긴 어렵다.


나는 블렌딩 한 커피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 가지 원두의 순수한 맛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름에 아이스커피로 제격인 블루마운틴만 빼놓고. 핸드드립용 분쇄 커피를 그때그때 배송받아 직접 내려서 마시고 있다. 아내와 아이들 왈, 아빠가 시작한 취미 중에 괜찮은 건 두 가지뿐이란다. 사진과 커피. 다 자기들이 혜택을 보는 것들이다. 사실 음악 감상 같은 취미는 나 혼자 즐기는 것이고, 자기들에겐 시끄러움만 주니까. 요즘 내가, 아니 우리 가족이 즐겨 마시는 커피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에티오피아 모카 시다모 G4 - 에티오피아산 원두답게 산미가 뛰어나고 약간의 와인맛이 난다. 향이 거부감을 주지 않고 은은하게 그냥 커피 다움을 보여주어 가족들도 만족한다.

2) 베트남 블루드래곤 로부스타 워시드 G1 - 쓴맛이 강하고 입안의 밀도와 중량감, 즉 바디감이 꽤 있다. 진한 커피가 생각날 때, 농도를 진하게 마시면 Eva Cassidy의 노래도 반드시 당긴다.

3) 헤이즐넛 향커피 - 이해할 수 없지만 딸이 좋아하는 커피, 덩달아 아들도 좋아한단다. 베트남산 원두에 헤이즐넛 향을 첨가하여 고소함과 풍부한 향이 특징이다. 드립퍼에 아직 물을 붓지도 않았는데, "커피 내린다!" 하며 딸이 뛰쳐나올 정도로 향이 개방적이다.

4) 블루마운틴 블렌드 - 콜롬비아, 말라위, 베트남 원두를 섞어 블렌딩 한 커피. 향이 진하고 바디감이 좋아 아이스커피용으로 여름에 즐겨 마신다.

5) 탄자니아 AA - 케냐 AA와 이름이 비슷하지만, 아프리카산 커피답게 향이 깊고 맛이 진하다. 특히 신맛과 단맛의 밸런스가 좋다.

6)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G2 워시드 - 은은한 꽃향기가 나며, 깔끔하면서 부드러운 신맛이 특징. 더치커피용으로 많이들 애호한다는데 우리는 그냥 내려서 마신다. 더치커피 내리는 장비가 없다.

7) 케냐 AA - 사람들이 가장 널리 마신다는 커피. 풍부한 향과 신맛이 강해 시큼할 정도로 느낀다. (나는 신맛을 좋아하지 않는다.)


  * 레스트빈의 상품설명을 참고했음.





8. 커피 한 잔 어때?


힘겨운 선택으로 마포대교를 찾은 이들을 불러 커피 한 잔씩 같이 하면 어떨까.


그래, 버티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다. 그렇지만 손을 놓지만 않으면, 지나갈 건 어떻게든 지나간다. 떠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떠나가고. 그리고 우리가 버텨내야 하는 숱한 날들 속에는 어떤 멋진 날도 숨어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멋진 날이 혹시 오늘이 아닐까? 두근대는 기대감으로 오늘이 올 때마다 함께 모닝커피를 마신다.


만약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이 그 날일 수 있으니 더 잘된 일이고. 거창한 삶의 전략과 성과지표에 끄달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럭저럭 보잘것없는 오늘들을 성실히 살아내는 것. 행복은 결국 거기에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한 줌의 햇살과 한 소절의 노래와 바람에 넘실대는 나뭇잎 하나, 내세울 것 없지만 행복한 일상의 정경 속에서 커피 한 잔 어때?





9. 카페 보헤미안


커피 방랑자들이 운명처럼 들리게 되는 곳


결혼이 기념해야 하는 중대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결혼기념일을 핑계 삼아 동쪽 바다를 다녀오다. 하슬라 뮤지움 호텔에서 새벽 일찍 일어나, 벌벌 떨면서 정동진 일출을 보고, 보헤미안에 들러 박이추 사장님의 커피를 마시다.


'세상에, 커피가 이럴 수도 있구나.'


감탄하다. 정말로 이런 커피맛이 있을 줄 몰랐다. 세상은 넓고 커피는 많았다. 오랜만에 커피다운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결혼은 같이 있으면 나다워지는 사람과 하는 거라고 하는데, 결혼 후 나는 얼마나 나다워졌을까? 그 사람은 또 얼마나 자신다와졌을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말했지. "나도 한 번밖에 결혼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라고. 이렇게 둘이 집시처럼 여행하며 커피를 마시니 결혼이라는 것도 꽤나 좋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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