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창가의 의자 위에 올라앉아 따뜻한 녹차를 마신다. 차 한 모금에 몸이 따뜻해졌다.
어제만 해도 세차게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흔들던 나무들이, 아침 햇살에 잘 마른 머리칼 같은 잎사귀를 한가롭게 흔들면서 서있다. 너 거기 있었구나 아직도, 자꾸만 하늘 위로 뻗는 가지로 인사를 건넨다. 앙상한 나뭇가지는 손을 닮았다. 팔을 쭉 뻗고 손을 펼쳐 보았다. 보통 여자의 손보다 크고 두툽 한 손가락 틈새로 나무의 정수리가 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다가구 주택들과 골목들 틈새로 나무에 반쯤 가려진, 큰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의 노란 3층 건물이 빠꼼히 보인다. 햇살이 반짝이는 오른쪽 나무들 너머로 아이들이 다녔던 초등학교의 연한 갈색 건물이 보였다. 목을 길게 빼고, 아이의 운동화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려고 애쓰던 나. 창 밖의 무언가에게 인사를 건네는 순간 '툭' 하고 울림이 시작된다.
벤치에 앉으니 모기들이 귀찮게 달려든다.
저녁 8시 일제히 가로등 불이 환하게 들어온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가까워 지다가 멀어져 갔다. 근처 카페에서 사 온 홍차는 어느새 식었다. 녹색 철제 담장을 타고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담장 옆의 나무를 칭칭 휘어 감고 올라가 꼭대기까지 이르렀다. 다른 생명에 줄기를 감는 것도 스스로의 힘이다. 할 수만 있다면 뒤틀린 몸으로라도 가시 돋친 줄기를 뻗어 성장해야 한다. 발치로 무언가 쓱 지나가는 기척에 놀라 보니, 보드라운 갈색의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장미 덤불 사이로 사라졌다.
노은주 화가의 '작업실'은 증명사진이다.
적당한 자기 검열은 있지만 뽀샵은 없는, 감정이 절재 되고 정도껏 사실적이다. 화가는 순간을 포착하여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의 날들을 가늠하고 있는 듯하다. 작업실이란, 작업을 하는 공간이다. 일상성에서 벗어나 몰두하는 곳이다. 작가 박완서는 저녁상을 물리고 밥 상을 펴놓고 원고를 썼다고 하고, 공지영 작가도 식탁 위에서 글을 썼고, 손원평 작가도 찌개 냄비를 밀어 두고 글을 썼다고 한다. 물론 유명해지기 전이었겠지만 열망이 현실을 뛰어넘은 것이다.
글을 쓸 땐 주로 카페를 가지만, 공원 벤치나, 건널목에서 날아가는 말들을 잡아챌 때도 있다. 집에서 가장 구석에 들어앉은 내 작은 방이 싫었다. 아이들이 사놓고 몇 번 쓰지도 않은 독서실 책상을 나란히 붙여 놓고 책장 두 개로 꽉 차는 내방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에 배달되어 온 두루마리 화장지 3팩을 밀어 놓고 나니 앉을 틈도 없어졌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장난감 방으로 쓰다가, 창고방이 되었고, 내가 불청객처럼 끼어들어 온갖 물건들과 공생하는 관계가 되었다. 요즘 들어서야 내방의 아침 햇살이 얼마나 화사한지, 창문을 열면 들리는 새소리의 경쾌함은 또 어떠한지 맛있게 느끼는 중이다.
젊은 날의 연탄불도 꺼진 차가운 자취방에서
밤새 책을 읽고 글을 쓰던 나는 적어도 나를 잃지는 않았다. 작은 방 안에서도 계절마다 옷장 정리를 했고, 책장의 먼지를 닦았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스스로를 지워온 결과이다. 오랜 세월을 애써 살았건만 결국은 초라한 나로 돌아온 듯 궁핍하게 여겨지던 이방에 산다는 건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 같았다.
평생 남의 집 방 한 칸에 살며, 40년간
보모로 일하며 15만 장의 사진과 영상을 남겼던 비비안 마이어에게는 거리가 곧 작업실이었을 것이다. 거리의 사진가인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오가는 길에 사진을 찍었다. 그녀의 사진을 보면 피사체가 된 사람들이 그녀를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진을 찍는 그녀는 거리에서 눈길을 끄는 존재가 아니었던 듯싶다. 그 점이 아마도 그녀를 자유롭게도 외롭게도 하였을 것이다. 그녀의 가난이 그녀의 사진을 훼손되지 않은 채 필름으로 잘 보존시켰듯이. 자신이 곧 작업실이었던 비비안 마이어는 찍는다는 그 행위의 순간을 채집하였던 것이었을까. 그녀의 사진들에는 제목이 없다. 1950년대의 뉴욕의 사람들과 비비안 마이어 자신의, 그 순간들이 있을 뿐이다. 남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간직하고 싶었을 사진들은 순간을 포착하였지만 오래도록 살아남아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노 은주 화가는 " 회화 작업은 과거나 미래, 반복과 순환을 내포하고 있는 사물이나 장면에서 시작하며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 사이의 잠깐 출몰하는 장면이나 연약하고 견고한 것 사이에 있는 사물들에 집중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사이의 중간의 상태를 상상하면서 그린다는 화가는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작업을 완수해 나간다. 오늘과 내일 사이, 어떤 것과 그것의 중간지점, 우리 삶의 여기를 응시하며, 이어가고 이어지는
점들의 코바늘 뜨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