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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by 그방에 사는 여자


흰 눈이 쌓인 겨울의 밤은 차갑게 식은 시루떡 같았다. 한 밤중 오줌이 마려워 참고 참다가 어둠 속에서 하얀 창호지를 더듬거리며 찾아 방문을 열면 뜰에는 가득 달빛이 쏟아지고 어둠은 저만치 엎드려있는 앞산으로 물러나 있었다. 어둠 속에 웅크린 앞산은, 한낯의 소란과 세세한 사연들을 삼킨 채 시치미를 떼고 검은 입을 꽉 다문 성 같았다. 무서움에 두리번거리며 볼일을 대충 마치고 호다닥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쓰면 어깨에 스민 새벽의 찬 기운이 녹았다.



"나무는 목탄의 근원이고, 목탄은 나무의 변형된 형상이며, 숲의 육신이 마지막 남긴 숲의 영혼"이라고 화가 이재삼은 말한다. 나무는 존재와 소멸의 과정을 통해 다시 태어나고, 마침내는 나무의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숲은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어둠이며 빛이다. 이재삼은 "달빛은 감각을 깨우는 마음의 빛"이라고 했다. 많이 그리지 않고, 많이 채우지 않을 때, 물안개처럼 밝음이 피어난다. 칠흑 같은 어둠을 그리는 작업은 숲의 영혼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으며, 목탄은 숲의 영혼의 사리였다.



비 그친 여름날 오후의 숲은, 후끈한 열기가 식지 않은 채 옅은 어둠에 잠겨있었다. 눅진한 송진 냄새와 나뭇잎 썩는 큼큼한 냄새가 한데 뒤엉켜 있었다. 잔가지로 나무둥치를 들춰보면 노란 꾀꼬리버섯이 그새 한 뼘은 자라 소복하였다. 양은 냄비에 버섯을 따서 담았다. 이따금 스치는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후두득 빗물이 떨어지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정적의 공간이었다.


여름 한 낯의 숲은 놀이터였다. 도토리를 줍고, 길고 부드러운 풀잎을 골라서, 가지런히 빗어 따아내리거나, 멍석을 깔고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다가 머루나 산딸기를 따먹었다. 그렇게 숲에서 놀았건만 밤의 숲은 왠지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어둠이 잦아드는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 놓고 저녁을 먹고 나면 저 멀리 도깨비 불빛이 반짝이는 저곳이, 도깨비 부부가 사는 곳일까 생각에 젖고는 했다.

뿔이 하나 달린 도깨비 신랑이 넥타이에 조끼를 입고, 도깨비 각시는 하늘거리는 드레스에 앞치마를 입고 저녁을 먹고 있을까 상상했다. 한 번은 정말로 도깨비를 보았다는 한두 살 많은 동네 오빠의 허풍에, 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산으로 도깨비 부부를 찾아 나서기도 하였다. 한참을 헤매었지만 친절하고 다정한 도깨비부부는 그새 숨었는지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커서야 반딧불이 도깨비 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밤의 숲에는 정녕들이 깨어나 서성이고 있는 듯하다.



'달빛'은 채워지지 않는 남겨진 공간이다. 어두운 밤 달빛은 폭포수를 비춰, 스스로를 밝히지 못하고 물을 빛나게 한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폭포 앞에서, 작은 가시 하나에도 움찔하고 파닥거리는 나는 얼마나 소진되어야 깊은 나무가 되려나, 아니 달빛이 되려나. 나는

어둠이 밀려드는 마당 끝을 아직도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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