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한 사람

by 그방에 사는 여자

장 보면서 사온 복분자주를 와인잔에 따랐다.

선명한 붉은색이 꼭 피 같았다. 섬뜩하기보다는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남자 주인공 엄마가 복분자주를 마시다가 취해서 화장실에서 쓰러져 있었는데 아들이 엄마가 피를 너무 많이 흘린다며 119에 울면서 전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탈 와인잔은 결혼할 때 12개 세트로 샀던 것인데 이제는 4개만 남았다. 8개는 어느 틈에 사라졌다. 이가 나가거나 깨져서 버렸을 것이다. 어디 와인잔뿐이랴, 오얏꽃 무늬가 이뻤던, 구색을 맞춘 도자기 그릇 세트며, 컵 바침과 티스푼까지 얌전히 담겨 있던 찻잔 세트들, 제법 묵직했던 크리스탈 양주잔들까지 사라졌다. 사는 게 최대의 과업이었던 나는 깨져서 버린 것들의 빈자리를 채울 생각도 못했다.


20대 시절, 자취방 인근에는 크리스탈 전문점이 큰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 밝게 빛나던 그 가게는 커다란 보석함 같았다. 나는 때때로 그곳에 들러 구경을 했다. 반짝반짝하고 투명한 와인잔들과 양주잔들. 섬세하고 아름다운 접시와 그릇들. 말이나 학 모양의 장식 품들 사이를 조심스레 걷고 있으면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손짓 하나, 발걸음 하나가 조심스러웠던 그 가게에서, 가끔은 와인잔이나 양주잔을 한 개씩 사 오고는 했다. 작은 자취방에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무늬의 잔들이 하나씩, 하나씩, 늘어났다.

컵들의 모양은 달랐으니 짝짜기라고 해야 하나. 골목 입구에 있는 슈퍼에서 라폴레옹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가장 싼 양주를 샀다. 아마도 나는 딱 고만큼의 사치는 누리고 싶었나 보다. 좋아하는 국화를 한 주먹씩 꽃아 두었던 크리스털 꽃병도 내 방을 채웠다. 그것은 나의 낭만이었나. 사치였나.


유리병 만드는 과정을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 유리 박물관에서였다. 쇳물 같은 붉은 불덩어리를 긴 대롱 끝에 매달고 돌리고를 반복하다 입으로 잠깐 숨을 불어넣고 틀에 넣고 잠시 식혀주자 유리병이 완성되었다. 아름다운 것이 뜨거움에서 나왔다. 쇠를 만드는 과정과 유리를 만드는 과정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를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원료는 모래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놀라웠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태생부터 아름다운 것은 없으니, 1200°c의 고열에 끓여지고, 배합하고, 정제하고, 모양을 다듬는 고된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결과물이 보석처럼 투명한 유리이다. 지금은 흔하지만 고대에는 유리가 보석이었다고 한다. 강함이나 약함은 어쩌면, 본질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길에 대한 선택의 문제일지 모른다. 그냥 그렇게 연마되어 그렇게 살아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복잡한 인연의 실타래에 엮이어 살아가는 이상 깨지고 금이 갈 수밖에 없거늘 억지로 이어 붙이려, 그 무엇으로라도 구멍을 메꿔보려 용을 써 보기도 하였다. 착한 사람으로 남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다 다만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오해받는 것이 몹시 억울했을 뿐이다. 자기 생만을 살아가는 이상 그냥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긁히고 깨지고 부서지는 것도 나였다. 지금의 나는 나를 잘 안다. 처음부터 잘 알았다면 그토록 고단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고, 주변을 환하게 밝히지도 못하고, 투명하게 비추지도 않는 그냥 한 사람. 살아가는 내내 절대 몸 밖으로는 한 걸음도 못 걸어 볼 그 한 사람이 바로 나다.



그림 속 바구니 속에는 유리잔들과 황금동으로 만들어진 잔들이 마구 담겨있다. 화가는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들을 통하여 세상사의 유한함과 허무함을 그렸다고 한다. 그림을 보는 순간 ' 으이구! 조심 좀 하지' 하는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무리 약한 것이라 하더라도 정성으로 감싸고 보호 한다면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또한 강하고 단단한 것도 보살피지 않고 내돌린다면 흠집이 나고 녹슬게 마련이다. 내 주변을 둘러싼 관계들을 돌아본다. 여전히 B급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끈끈하고 다정하지 않다. 그나마 C급 막장 드라마는 아닌 것이 다행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마음의 깃을 한 땀 한 땀 다 헤쳐 보여야 관계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삼키고 침묵하며 우멍하게 있어도 될 것이다. 일찍이 비트겐 슈타인은 ' 이해할 수 없으면 침묵하라'는 지혜로운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복분자주 한잔 마시고 와인잔은 잘 닦아서 선반에 올려 두었다. 날은 이미 저물었으나 하루가 다 간 것은 아니다.

취기 때문인가 갑자기 마음이 설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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