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발로 마구 뛰어들어 청량한 물 밭을 흐정크려 놓고 싶다.
너무 깔끔하고, 맑은 것들에게는 성을 내고 싶다.
이방인인 것 같은 기분이 들던 날 늦은 저녁 산책을 나섰다. 차갑게 식은 바람이 달려들어 롱패딩을 단단하게 여몄다.
밤길에는 반짝이는 밤비가 내렸다.
우산을 툭툭 털고 빗물에 얼룩진 롱패딩을 휴지로 대충 문지르고, 마감 직전의 도서관 서가를 빠르게 흩었다.
윤대녕의 소설 '피에로들의 집'과 손원평의 소설 '서른의 반격'을 대출했다.
어서 나가라고 내모는 듯 도서관의 불은 서둘러 꺼지고, 바삐 우산을 찾아들고 밖으로 나왔다.
비는 아직 내리고, 오늘 그래도 걸었고 도서관도 다녀왔으니 하루를 다 망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저녁의 끄트머리를 잡고 걸었다.
책을 펼쳐 보니 '서른의 반격'은 전에 읽었던 책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서른에서 한참이나 멀어졌는데 이 책은 왜 빌렸을까?
설마, 마음의 연령은 아직 서른에 머물러 있고 싶은 걸까?
저 혼자 나이란 나이는 다 먹은 것 같던 그 나이.
스물대여섯 살 시절엔 서른이 뭐 그리 대단한 나이라고, 지구의 종말을 카운트 다운 하듯이
서른이 되는 해를 짚었다. 서른이라는 나이까지 뭐 하나 제대로 해낸 것이 없는 나를 질책했다.
그러다, 서른이 넘어도 여전히 살아 있고 살아가던 날 깨닫는다 자신이 서른을 오해하고 있었음을.
서른은 그렇게 대단한 의미가 있는 나이가 아니었고, 살면서 맞이하는 모든 나이는 그렇게 대단한 나이는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세상에 소심하고 유아적인 복수를 하면서도, 여전히 살아간다. 서른을 넘어서도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세상을 살아낸다는
그것, 오히려 삶을 알기에는 서른은 너무 어리다는 것이, 서른의 반격이었다.
윤대녕 작가의 이름만 보고 빼들었던 ‘피에로들의 집'은 호퍼의 그림들로 이야기가 시작되어서 놀랍고 반가웠다.
책 속에서는 호퍼의 그림들과 그의 그림을 모티브로 한 영화가 열거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오늘, 운이 조금은 좋았나 보다. 책을 읽다가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을 유튜브에서 찾아보았다.
호퍼의 그림이 열두 작품이나 보이는 다분히 연극적인 영화였다.
첫 장면에 등장한 여자가 책을 펼쳐 들었다. 그 책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찾아보니,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이었다.
제목을 쓰지 않고 시를 썼다는 시인이 궁금해졌다. 궁금하면 언젠가 읽게 되겠지.
소설 속에서는 우연히 만난 타인들이 함께 모여서 밥을 해 먹고 술을 마신다.
서로의 민머리를 내놓듯이 가까워지고, 돌보고 돌아본다. 생각해 보면 인생의 만남들은 원래 다 우연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설다. 현실에서의 나는 김치 한가닥 나누는 것도 여러 갈래의 마음이 드는데, 소설 속 착한 사람들은 애먼
사람들끼리도 걱정거리를 잘도 나눈다. 마음은 여리지만 말투는 사나웠던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을 돌봐 줬던 사람들에게 유산을 남겼다.
구스타프 카유보트의 그림 ‘예르, 비의 효과‘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헝클어졌던 마음이 가라앉아 맑은 윗물이 그림처럼 떠올라 있었다.
부유하게 살면서 생계 때문에 자신의 그림을 팔지 않아도 되었던 화가는, 동료 화가들을 후원하였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11살 어린 하층계급의 여인과 진지한 관계를 유지한 그는 많은 연금을 그녀에게 남겼다.
그는 그림처럼 맑은 마음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가진 것을 나눌 줄 알고,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줄 줄 알았다.
나는 또, 투명함 속을 저벅저벅 걸어가서 흙탕물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몹시 간질거릴 것이다.
그럴 땐 또 어디든 걸어가 보리라.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를 움직이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