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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방에 사는 여자
Dec 17. 2023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영화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핸드폰을 열어서 예매를 했다. 평일 오전 시간임에도 꽤 많은 좌석이 예매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둘째를 챙겨 학교에 보내고 설거지는 그대로 두고, 집을 나섰다. 영화관까지는 걸어서 25분가량 걸린다.
비 오는 날도, 걷기도 좋아하는 나는, 투명 비닐우산을 쓰고 호젓하게 걷기 시작했다.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이 거의 1년만 인 듯했다.
큰아이가 재수를 시작하면서는 평일 낮에 혼자 영화 보기를 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우선 챙겨야 할 끼니가 더 늘어났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걸어가는 길 옆에 새로 오픈한 카페가 있어서 따뜻한 커피를 사서 갔다. 하루 이틀 전쯤에 오픈한 듯 어수선한 카페에서는 큰딸 또래의 아르바이트생이 일을 배우고 있었는데, 긴장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 딸도 저렇게 배워가며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는 날이 곧 오겠구나 생각했다.
영화관에 도착해서 티켓을 발권하고 보니 입장을 하고 있었다. 서둘러 화장실에 다녀온 후
나도 입장을 하였다. 예매할 때 만 해도 비어있던 옆자리에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의 옆에는 부인인듯한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대부분 옆에 이성이 앉으면 불편해서 라도 부인과 자리를 바꿀 텐데 옆자리의 남자는 그대로 있었다. 영화가 인기가 있고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내용이라 그런지 평일 오전인데도 꽤 많은 사람으로 영화관이 붐볐다.
커피는 알맞게 식어 있었다. 혼자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시간과 공간과, 그날을 온전히 내 것으로 갖는 것이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옆자리의 남자는 영화 관람 하는데 크게 방해되지는 않았다.
나는 혼자 놀기의 달인이었다. 결혼 전에는 혼자 버스 여행도 자주 다니고, 영화도 혼자 보기도 많이 했다. 친구들이 모두 결혼을 한 이십 대 후반부터는 더더욱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었고,
혼자인 게 지쳐서 한 결혼은 나를 더욱 고립시켰다. 아이들과 복대기는 시간 속에서도 결국은 혼자였다.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하게 그리웠던 육아의 시간을 지나고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만나게 된 지인들과, 조조 영화를 보는 자유가 내게도 주어졌다. 아이들이
자라나며 누군가는 이사를 가고 다른 이는 학원비를 벌어야 한다는 미명하에 사춘기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 탈출을 감행했고, 나는
한참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있는 것이 좋다며 눈물로 하는 호소에 잡았던 문고리를 놓았다.
결혼 후 처음으로 혼자 보기를 시작한 영화는 리틀 포레스트였다. 아줌마가 되고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무엇이라고, 큰 용기가 필요했다. 젊음과 꽉 찬 에너지가 충만하던 시절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처음 혼자 극장에 간 날은 괜히 뒤통수가 당기고 따가웠다. 어느 누군가는 평일 대낮에 한가하게 영화를 보니 좋겠다고 샐쭉 일 것 같고, 혼자 영화를 보는 걸로 봐서 주변에 사람이 없나 보다고 수군 거릴 것 같았다. 한심한 아줌마로 볼 것 같은 괜한 마음에, 그 마저도 용기가 필요했다. 그날도 아침 7시부터 분주하게 움직여 아이들 아침밥을 차려주었고, 영화가 끝나면 버무려질 배추가 주방 베란다에서 절여지며, 얌전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는 터였다.
막상 티켓을 끈고, 뒷자리 커플의 꽁냥꽁냥을 들으며, 집에서 보온병에 담아 간 커피 홀짝이며
본 영화는 일상의 모험을 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리틀 포레스트를 봤던 시기는, 많이 지치고 힘들었고, 쉬고 싶은 시기였다. 그 해 겨울 아버지가 갑자기 거짓말처럼 돌아가시고, 극심한 상실감, 허탈감과 죄책감, 살아도 살아도 내 인생에 별게 없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던 시기였다. 영화를 보면서, 나직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고향집 마루 문을 열고 들어가 눕는 상상을 했다. 더 이상 아무도 없는 그 집에 가서 쉬고 싶었고, 영화를 보면서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인공이 도착한 날 밤
밭에 가서 뽑아온 배추로 배추 전을 부쳐먹듯이
배추 전도 부쳐 먹고. 콩국수도 더 자주 해 먹고,
양배추 부침개도 아이들 간식으로 많이 만들어 주었다. 허기를 채우며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를 하나씩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매일 천변을 걷기 시작하고, 가끔 카페에 가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혼자 영화관에 가기도 했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좋아하는 장소에 정기적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 일주일에 5일은 가서 2시간가량 머물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좋아하는 천변이나 공원을 역시 주 5일은 가서 2시간가량을 걷는다.
삶의 어떤 단계를 통과하고, 다시금 나에게는 그 옛날처럼 혼자 쓸 수 있는 시간들이 적금처럼 늘어간다.
영화가 끝나고는 내가 좋아하는 떡 만둣국을 먹었다. 국물이 담백했다. 내가 좋아하는 맛이다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