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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Sep 05. 2023

나는, 못난 자식이었다.




             

 

근 두 달 만에 A를 만났다. A는 큰아이 초등학교 1학년 같은 반 아이 엄마로 만나 아이들이 스므살이 된 지금까지 만나는 지인이다. 아이들 초등학교 5학년을 막 시작할 무렵A가 근동으로 이사를 갔어도 한 달에 한번 정도 만나곤 했는데 이번에는 텀이 길었다.



집 앞으로 온 A의 차를 타고 가는 길, 제법 비가 많이 내렸다. A가 비가 오는 창가에서 가만히 있고 싶다고 하기에 "둘째 아들이 아직도 학교 안 가겠다고 하는 거야?"물으니 그건 아니라고 한다. 성장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같은 나이대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우리에게는 동질감, 동병상련 그런 것이 있었다. 삼 개월 전에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널뛰는 마음을 부잡 지도 못하는 와중에 둘째 아이가 학교에 안 간다며 커튼을 치고 어두운 방안에 틀어 박혀 애를 태운다는 말을 들은 것이 두 달 전이다."우리 어머님이 아프셔.... 소화가 안 돼서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 가라고 해서.... 암 이래..."



A의 시어머니는 조금만 불편해도 병원에 가서 검사받고 찍어보고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몇 년 전에 뇌경색이 와서 함께 사는 시동생이 보살피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중퇴 후 직장도 안 다니고 결혼도 하지 않은 시동생은 18평 아파트에서 시어머님과 둘이 산다고 했다. 모든 생활비와 병원비등은 A네가 부담하고 시누이네가 보테가 하는 모양이었다. 평생을 무직 상태로 집에만 있는 시동생과 큰 아들에게만 의탁하는 시어머니가 때론 무거운 짐처럼 느껴진다고 하면서도 뒷수발을 다하는 A였다. 아들들이 자꾸 방안에 틀어 박힐 때마다 저 녀석들이 삼촌을 닮으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든다고 했다.


상황이 바뀌면 사람의 위치도 바뀌는 것인지 몇 년 전부터 시어머니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곁에서 수족이 되어 주는, 결국에는 다른 형제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시동생이 고맙고 든든하다고 하는 A, 지금도 병원에 계시는 어머님을 시동생이 돌보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진짜 효자는 자난 큰아들이 아니라 시동생일지도 모르겠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고 못난 자식이 효도한다고, 외로운 어머니 곁에서 평생을 함께하는.


나는 못난 자식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미운오리새끼, 홍당무라는 동화를 좋아했다. 한글을 떼고 동화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책 속에는 어쩌면 그렇게 나와 비슷한 아이들이 많은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고개고개 넘어서 걷고 걸어서 학교를 오가던 시절, 집에 가면 혹시나 서울서 친부모님이 큰 차를 타고 와서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 이제 집에 가자!" 하며 나를 데리러 오는 상상을 하곤 했다. 소공녀처럼 잠깐 맡겨진 것이라고. 당연하게도 친부모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또 생각했다. 엄마 찾아 삼만리의 마르코처럼 언젠가 때가 되면 내가 찾아 나서야지 하고. 결국에는 그때라는 게 오지 않았다.



찬밥 같은 끼인 둘째였던 나는 외로운 아이였다. 사랑이  고파서 손톱만 물어뜯던. 엄마가 기절하다 깨다를 반복하며 남동생을 낳던 날, 동네 할머니는 내게 남동생 봐서 좋겠다고 했지만 다섯 살이었던 나는 무언가 어리 둥절한 느낌이었다. 그때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남동생을 봐서 내가 사랑받을 만한 아이가 된 것인지 내가 받지 못하는 사랑을 듬뿍 받는 경이로운 존재가 나타난 기쁨을 누려야 하는 황망함인지  모호한 감정을.


내 기억에는 없지만 엄마는 그 귀한 남동생을 세 살이 넘도록 젖을 물리고 업고 다녔다고 하니 나는 그 품에 안겨 보지 못한 외로운 아이였을 것이다. 막내 여동생이 태어나고, 언니는 예쁜 큰딸이라서 남동생은 아들이라서 막내는 막내라서 애정을 받는 사이 나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때는 자존감이라는 말을 몰랐지만 어쨌든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같은 건  신발로 신을 수 없을 만큼 바닥에 나뒹굴었다.


고등학교 시절 야간 자율학습을 하느라 막차를 타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대문은 거의 잠겨있고 그 문을 한참이고 두드리고 두드려야만 했다. 언니는 시집도 잘 갔고 아들도 둘이나 쑥쑥 낳아 엄마의 자부심이 되었다. 아픈 엄마를 간호하던 어느 날 엄마는 내게 말했다."못난 자식이 효도한다"


엄마가 애지 중지 하던 아들이 짧은 생을 마감했을 때 그 귀한 아들 말고 내가 갔으면 엄마의 마음이 덜 아팠을까? 하는 생각에 못난 자식은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이십 대의 초반을 다 보냈다. 막내는 수도자가 되어 집을 떠나 멀리 가고 언니는 고된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와중에 사별을 하고 두 아들을 홀로 키우느라 여력이 없었다. 세상을 유람하는 여행자가 되고 팠던 나는 날개를 접고 부모님 곁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임종 자식은 하늘이 낸다고 했는데 병원에서 모시고 와서 우리 집에서 돌아가신 엄마는 나 혼자 눈을 감겨드렸다.

나는 귀한 자식이었던 걸까? 아니면 못난 자식에서 귀한 자식이 된 걸까?



내 생일은 제대로 기억을 못 해 지나치기 일쑤인 엄마는 시집간 언니의 생일은 기가 막히게 잘 챙겼다. 언니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도 혼자 힘으로는  들 수 없을 만큼 보따리를 싸들고 두 시간 거리의 버스를 타고 오셨다. 보따리 속에는 집에서 만든 엿 식혜 강정  산자 떡도 있고 참깨 참기름 오죽하면 시장에서 튀긴 통닭도 몆 마리는 들어 있었다. 버스 터미널까지 마중 나간 나는 그 어마 엄한 보따리의 양에 놀라곤 했다. 아마 언니가 결혼하고 몇 해는 그리 하셨던 것 같다. 갓 결혼한 큰딸이 시부모님 사랑받으며 잘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그 보따리 속에 담으셨을 것이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언니의 생일은 농사일이 바쁠 것 없는 2월이었고 내 생일은 칠월삼복더위에 한참 농사일이 바쁠 때라 잊기도 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리가 있는 말이지 싶다. 나이를 먹고 애들을 키우며 일상을 살다 보면 생일도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인데 아이들이 큰 요즘엔 아이들 덕분에 기억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가끔 "색동옷을 곱게 차려입고 밤에 산길을 걸어가는 거 같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고 설움이 많았던 엄마에게, 자신을 가장 많이 닮았던 나는 아마도 영원한 못난 자식일지 모른다.


무겁고 축축한 내 못남을 꺼내어서 햇볕에 바삭하게 말려서 다시 앞 주머니에 넣어 두면 또다시 축축하고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내 못남으로 인하여 나는 굽어 보고, 살펴보고, 오래 보고, 두발은 땅에 단단히 디디고 멀리 보며, 미련하게 버티며, 주변인으로 변두리의 삶을 살아왔다. 내 안의 못난 자식은  뜯어먹기 좋은 나의 풀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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