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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Sep 05. 2023

묵 한 그릇, 세월 한 주걱



               


도토리 가루를 한 공기 냄비에 넣고 물을 여섯 공기 붓고 긴 나무 주걱으로 천천히 풀어서 저 저으면서 올리브유 한 방울 굵은소금 한 티스푼 넣고 렌즈의 불을 켰다. 저어 주다가 도토리 가루가 진한 갈색으로 변하고 '뽀글 폭 뽀글 폭'하며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불을 중불로 낮추고 나무 주걱으로 원을 그리면서 쉼 없이 저어 준다.


 십 분쯤 젓다 보니 묵이 되직한 것 같아서 물을 한 공기 더 넣고 되직한 묵이 다 풀어질 때까지 십 분쯤 빠르게 저었다. 힘들다고 젓기를 멈추면 폭 폭 하고 기포가 올라와서 터지기 때문에 데일 수 있으므로  빠르게 주걱을 움직여야 한다. 나무 주걱을 옆으로 비스듬하게 들어서 농도를 살펴보았다. 묵이 주르륵하고 묽게 떨어졌다. 불을 약불로 낮추고 빠르게 십 오분정도 젓고 다시 농도를 살펴보았다.'주르륵 뚝 뚝'떨어지는 것이 농도가 맞겠다 싶어서 레인지 불을 끄고 남은 잔열로 오분정도 저어주다가 넓고 납작한 사각 스텐통에 다 쑤어진 도토리 묵을 부었다. 스텐통 뚜껑을 살짝 덮어서 식탁 한쪽에 올려놓았다. 아침이면 찰진 도토리 묵이 되어 있을 것이다.


도토리 묵 쑤는 법을 배운 것은 결혼한 후 시어머님께서 명절 때마다 묵 쑤는 것을 옆에서 거들면서부터였다. 시어머니께서는 크고 넓적한 통에 아주 길고 넓적한 나무 주걱으로 부지런히 저어가며 묵을 쒔다. 옆에서 아무리 눈동냥으로 배워도, 혼자 묵을 쑬라치면 까맣게 타기도 하고 망치기 일보직전까지 가서 황급히 어머님께 도움을 청하곤 했다.


도토리 가루를 사서 작은 냄비에 물 붓고 묵을 쒀 봤는데 농도를 맞추기도 힘들고 꺼떡 하면 눌어붙고, 까맣게 타고, 비법이랄 게 별거 없는 거 같은데 내가 쑨 묵은 시댁에서 먹던 것 처렁 찰지지가 않고 툭툭 끊어졌다. 어머님께서 커다란 나무 주걱을 비스듬히 들어 보이며 "주르륵 뚝 뚝 떨어져야 하는겨"하고 시범을 보이셨으나,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 채기 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물과 도토리 가루의 비율을 6:1로 맞춰야 한다고 했는데 묵을 쑤다 보면 물을 더 넣어야 농도가 맞을 때가 있는데, 살림에 신출내기였던 나는 매번 정확한 6:1만 고집했기에  실패를 밥 먹듯이 했다. 실패의 과정을 거쳐서 도토리 묵의 달인이 된 비법은 바로 유연함에 있었다. 딱 정해진 비율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더 하거나 덜 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장마가 끝나면 이산 저산 동네 한가득 "텅! 텅! 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집 집마다 아이들이 커다란 메를 끌고, 자루 하나씩 들고, 머리에는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온 동네 상수리나무를 털기 시작하는 것이다. 메는 커다란 통나무를 둥그스름하게 다듬어서 만들었는데 한쪽에 구멍을 뚫고 긴 나무 손잡이를 박아 만든 것이라 크고 무거워서 들고 다니기는 어렵고 끌고 다니다가 큰 상수리나무를 발견하면 힘껏 들어서  '쿵' 치면 도토리들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맨머리로 맞으면 금방 혹이 날 정도로 아프니까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도토리를 줍기 시작했다.


이산 저산 돌아다니면서 도토리를 줍다 보면 어느 정도 자루가 차고 언니와 나는 자루를 끌고 와서 장독에 있는 항아리에 쏟아 놓고 물을 받아 놓았다. 도토리를 물속에 담가 놓으면 떫은맛이 우려 지는 것이라고 했다. 여름 방학 동안 도토리를 털고 줍다 보면 동네 상수리나무는 다 털어서 메를 아무리 쳐도 더 이상 도토리가 떨어지지 않는 날이 온다. 동네 아이들과 누가 항아리에 도토리를 더 많이 채우나 내기도 했고, 서로 자기네 항아리가 꽉 찼다고 우기며 으스대기도 했다. 방학이 끝나 갈 무렵 엄마는 도토리를 소쿠리에 쏟아 물기를 빼고 멍석에 고르게 널어서 말렸다. 도토리 몇 날을 말 리다 보면 여름 한낮의 햇볕에 도토리 껍질이 바싹 하게 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지기 시작하고, 맨발로 그 위에 올라가서 자근자근 발로 밟거나 엄마가 절구 공이로 밀고하면서 겉껍질을 벗겨 내고, 바삭하게 더 말려서 속 껍질도 벗겨낸다.


 잘 마른 도토리를 엄마가 방앗간에서 가루를 내어 와서 탱탱한 도토리 묵을 쑤어 주시면 코를 박고 맛나게 먹었다. 엄마가 만들어준 묵무침은 어찌나 찰랑 거리는지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가져가려면 어느새 찰랑거리며 올챙이처럼 빠져나가곤 했다. 긴긴 겨울밤 아버지가 출출하다 하시면 엄마는 김장김치 잘게 썰고 깨소금을 넉넉히 뿌려 묵국을 만들어 주시곤 했는데 겨울밤에 먹는, 차갑고 개운한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결혼을 한 후 언젠가 우리 집에 오신 엄마에게 내가 쑨 묵을 차려 낸 적이 있는데 어찌 이리 맛있냐며 맑간 웃음을 보이셨다. 늦여름 산책을 하다 보면 '휙 '하고 부는 바람결에 도토리 한 알이 '툭' 하고 발치에 무심히 떨어질 때가 있다. 마치 누군가 보내는 반가운 인사처럼.


묵 한 그릇에 담겼던 많은 날들의 올망졸망 손길들은 세월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오늘 내가 쑨 도토리 묵 한 그릇이 먼 나중의 어느 때 인가는 충만 한 사랑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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