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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Sep 05. 2023

서늘한 저녁

나는 도마질 소리를 좋아한다.

방바닥의 온기가 차갑게 식어가던  겨울날 새벽, 도마질 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오고 쇠죽 끓이시는 아버지와 아침을 준비하시는 엄마의 두런두런 말소리가 더해지면 어느덧 방바닥은 따뜻해져 오고 나는 이불을 한껏 끌어올리고 아랫목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만은 따뜻하고 안전한 것이 나를 감싸고 있는 느낌이 방안 가득 찼다. 그 기억에 기대어 내 인생에 넘실대는 파도를 가만가만 잘 넘어왔다.


탁 탁 탁

어두워진 집안에 도마질 소리가  울린다.

자박자박 끓고 있는 냄비에 두부 반모를 납작하게 썰어서 넣고 국자로 국물을 떠서 서너 번 두부 위로 부었다. 냉장고에서 까놓은 통마늘과 대파를 꺼내 마늘은 칼손잡이 뒷부분으로 콩콩 찧고 대파는 어슷어슷 썰어서 냄비에 넣고 뚜껑을 닫으려는데 "마늘을 나위 넣어야지"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풋고추도 썰어 넣고"

나는 "그래"하고 나직이 대답을 하고  내동실에서 얼려둔 풋고추 두 개를 꺼내어 숭숭 썰고, 마늘도  찧어서 냄비에 넣고 국자로 국물을 떠서 간을 봤다. 칼칼하고 구수하다.

"맛있네"누구에게랄것도 없이 혼잣말을 하고 냄비 뚜껑을 닫고 불을 줄였다.


돌아가신 지 어느덧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엄마는

불현듯 찾아와 뒷짐을 지고 등을 구부린 채 훈수를 두신다. 빠글빠글 까만 파마머리에 푸른 꽃무늬 칠부 블라우스를 입은 생전 모습 그대로.


비가 흩뿌리고 지나간  저녁, 빨래를 걷으려고 베란다로 나가니 서늘한 바람이 비릿한 비냄새와 함께 훅 불어온다. 저녁 하늘은 멀리부터 검게 물들고 있고 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떠나간 사람들과 떠나온 사람들, 그립지는 않아도 생각이 나는, 누군가는 저물어 가는 이 저녁에 그냥 한번 나를 생각해 보는 사람들이 있을까?


불행에 있어서도 행복에 있어서도 열외였던 나는 엉거주춤 살아왔다. 슬픈 순간에 마음 놓고 슬퍼 한적도 기쁨의 순간에 온전히 기뻐 한적한 적도, 한 번도 어딘가에 무언가에, 푹 담긴 적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무릎을 세우고 가장 외롭지 않을 선택을 하고 그 하루는 매번 비슷한 모습이었다.

비루하게 들러붙어 살아내는 동안 아이들은 미루나무처럼 반짝이며 자라났고 나는 나이 들며 갈리고 물들어간다.


바깥 마당 멍석에 널어놓은 콩꼬투리를 채 덮어야 할 것 마냥 마음이 부산한 저녁, 아직 돌아오지 않는 식구들을 기다리며 된장찌개를 끓여 놓고 바삭하게 잘 마른 수건을 차곡차곡 개어 두고, 빗장건 대문을 두드리고 두드려서 검은 얼굴로 성큼 들어서면 고향 집, 봉당의 전구는 바람결에 흔들릴 텐데 던진 공을 더는 받을 일 없는  서늘한 저녁이 오면 찾아가리,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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