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리틀 포레스트
텔레비전이 없는 나는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이용한다 아니, 애용한다. 영어공부를 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넷플릭스를 시작해서는 영어는 꼴 도보기 싫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우리나라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또 보고 또 본다. 가장 많이 여러 번 본 영화는 우리나라 버전의 리틀 포레스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담겨 있어 어느 때고 보기 딱 좋은 영화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요즘 "파테크"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유튜브에서 구독해서 보는 채널은 없지만, 그래도 자주 보는 채널은 신사임당 채널이다. 나는 거의 모든 직장인의 꿈은 퇴사라 믿는다. 내가 그렇기 때문에.
퇴사를 위해서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월급만큼의 수입이 들어오도록 만들어 놔야 쉽사리 퇴사를 할 것 같았고 몇 년 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온라인몰에 대해 많은 정보가 있다고 생각했다. 신사임당 채널을 보다가 "파테크"를 듣고 대파의 가격이 아주 많이 올랐다는 것을 알았다. 국물이 들어간 요리는 못해도 너무 못해서 대파를 쓸 일이 많지 않았고 최근에는 주방에서 일어나는 일이 너무 귀찮아서 대충 빵과 버터로 하루를 버티고 있던 터라 대파의 가격이 이렇게나 올랐는 줄 몰랐다. 요즘 파를 키워서 먹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는 지난 겨우내 키워서 먹었던 나의 파가 생각났다.
지난겨울 나는 파를 키웠다. 집을 이사하고서 휑한 집에 온기를 더해주려고 화훼농장에 가서 화분을 샀다. 야심 차게 아주 큰 여인초와 조금 큰 올리브 나무를 데려왔고 사장님이 작은 로즈마리 화분도 두 개를 주셨다. 집이 너무 따뜻했다. 화분을 들이고 다음날 개미가 나타났다. 집개 미라 하기엔 너무 크고 대왕 개미는 아닌 정도의 크기의 개미. 그 개미는 여인초 화분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하루에 열 마리도 넘게 나왔다. 며칠을 지켜보다 결국 화원에 전화를 했고 사장님은 아무래도 도로 데려가야겠다시며 바쁜 와중에 환불을 해주셨고 로즈마리 화분은 제가 다시 제값을 내겠다고 했으나, 손사래를 치시며 (물론, 전화로.) 그러는 거 아니라며 다음에 또 오라고 하셨다. 나의 집에서 살짝의 온기가 사라졌지만, 그래도 올리브는 잘 크고 있다.
올리브가 걱정스러웠으나, 진짜 큰 문제는 로즈와 마리였다. (각 나무에 이름을 지어줬다, 올리브 씨, 로즈 씨, 그리고 마리 씨.) 물도 줘보고 햇볕도 쪼여보고 영양제도 줘보고 했으나 결국 조금은 가냘펐던 마리는 결국 떠났다. 큰 맘먹고 동네 꽃집에서 이태리산 토분으로 분갈이도 해줬던 나무였다. 휑한 화분과 며칠을 지내는 어느 날, 친구가 자기는 요즘 파를 키워먹는다며 그 재미가 쏠쏠하다는 거다. 아! 나도 집에 얼마 전에 사놓은 대파가 한 단 있었지! 파를 모두 정리하고 하얀 부분만 몽땅 다 심었으면 됐을 일을, 한 대씩 먹을 때마다 하나씩 심어갔다. 처음 하나의 대파 뿌리를 심었을 때, 동생이 놀러 와선 어차피 키우지도 못할 거 그냥 빨리 먹으라고 했다. 매 주말이면 우리 집에 오는 동생은 그다음 주말에 왔을 때 놀라워했다. 정말 파가 쑥 자라 있었기 때문이다. 파는 정말 잘 자랐다. 키워서 먹을 거면 이름을 지어주면 안 된다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파라 불렀다.
나는 파뿌리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그리고 기특하게도 별다른 걸 해주지 않아도 쑥쑥 자랐던 파가 신기해서 #파를키워요 라는 해시태그로 인스타그램에 일기를 썼다. 그렇게 파 재배는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가 되었다. 회사 친구는 나의 파가 자라는 것을 보며 같이 즐거워해 줬고, 내 인스타그램에 파의 사진과 일기가 올라오지 않을 때는 나의 파들의 상태를 궁금해했다.
첫 파의 수확은 조카가 해줬다. 주말마다 우리 집에 오는 이제 일곱 살이 된 조카는 파가 자라는 것을 신기해했고, 언제쯤 이 파를 수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볼 때마다 물었다. 그렇게 조카는 "수확"이라는 단어도 알게 되었고 키워서 먹는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나의 첫 파가 수확되던 날은 1월 30일이었다. 처음 심었던 날이 1월 11일이니 20일 만에 첫 수확을 할 수 있었다. 그날은 동생네 식구 셋을 초대해 저녁을 먹던 날이었다. 특별히 초대랄 것도 없다. 큰 조카가 태어나고 200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살던 나는 거의 반쯤은 조카의 육아에 가담했다. 첫 이유식을 만들었던 것도 나였고, 조카가 처음으로 링거를 맞았던 날도 나와 함께였다. 그날은 나도 울고 조카도 울었다. 지금은 이사를 가서 조금 더 멀어져서 일주일에 3-4일 정도 함께 하지만 이전에는 주 7일을 함께 했다. 그냥 나만 따로 우리 집에서 잠을 자던 사이었다. 그렇게 동생네가 우리 집에 왔고 나는 조카가 올 때를 기다려 파의 첫 수확을 부탁했고, 조카는 신나게 달려가 파를 수확했다. 그렇게 나의 파는 등갈비 구이의 한 부분이 되었다.
첫 수확인 끝나고 두세 번의 수확을 끝으로 나의 파는 운명했다. 엄마의 조언대로 쌀뜨물을 가만히 두어 가라앉은 전분도 거름으로 주고 마켓컬리에서 오는 얼음팩을 녹여 물도 주며 나름 첫 농사를 지었더랬다. 동생은 파를 저렇게 심으면 평생 먹을 수 있는 거냐고 물었고 엄마는 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속을 뽑아 올리면 그것으로 끝난다고 했다. 파는 열정적인 식물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하고 그 끝을 맞이 한다니 나도 모르게 멋지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수확은 했지만, 나는 혹시 몰라 그대로 파를 두었다. 엄마가 주말에 잠깐 들렀다가 내가 낮잠을 자는 사이에 더 이상 올라올 것이 없는 파를 확인하고는 화분을 정리해주고는 집으로 갔다.
지난 겨우내 열정을 불태우느라 수고했어. 그리고 고마웠어.
이렇게 나의 첫 파키 우기는 끝이 났고, 텅 빈 화분을 보면서 다음엔 무얼 키워볼까 생각한다. 여름이 다가오니, 근사하게 방울토마토를 키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