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차 Jan 05. 2024

낯선 방

#6

얼마큼 잤을까? 눈이 떠졌다. 개운하다. 불을 켜놓고 잠이 든 탓인지, 환하다. 눈이 부시게 환하다.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깨달은 사실은 늘 잠들기 전과 아침에 눈 떴을 때 보던 그 천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내가 누워 있는 침대는 이전과 다르게 너무 푹신하고 포근하다. 심지어 처음 서울에 올라올 때 엄마가 해준 촌스러운 꽃무늬가 있는 과거에는 두꺼웠지만 지금은 솜이 푹 죽어 얇아진 이불 위로 싸구려 겨울용 담요를 하나 더 덮고 자는데 그 무게감과 거친 느낌이 아니라 이불마저 새하얗고 포근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긴 내 방이 아니다. 분명히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와 내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내 방이 아니라니! 잠들기 전에 분명히 TV를 틀어 놓고 잠이 들었다. 이 낯선 방에서도 알 수 없는 언어들이 뒤섞인 소리가 TV에서 흘러나온다. 벌떡 일어나 창문 쪽으로 갔다.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니, 너무나도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국적이다.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빌라들이 빼곡한 우리 동네의 골목은 분명히 아니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는 이 거리는 어딜까? 예전에 출장으로 왔던 곳인가? 침대 옆 테이블에서 안경을 집어 들어 끼고 다시 창 밖을 보았다. 아마 꿈일 것이다. 매일 아침 출근해서 보는 그 거리의 모습이다. 책상 앞에 붙어 있는 말뫼의 거리. 그곳이다. ’ 내가 왜 여기에 있지?’ 핸드폰을 열어 본다. 혹시 어떤 내용이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카톡에는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메시지들이 좌르르 뜬다. ”야! 겨울 휴가라니! 잘 놀다 와라!”, ”선물 잊지 말아라.”, ”숨겨 놓은 여자라도 있는 거냐? 뜬금없이 왠 스웨덴?”… 기억에도 없지만 나는 휴가를 내고 여기에 왔나 보다. 감기에 걸려서 고생하던 그 모습이 꿈이었나? 분명 집 근처 병원에 가 잠깐의 진료 후에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서 약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새로 생긴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던 것 같은데 이게 꿈인 건가? 꿈과 현실이 뒤죽박죽이다. 침대 옆 협탁에는 지갑과 여권케이스가 보인다. 출장 다닐 때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처음 해외 출장을 간다고 했을 때, 여자친구가 선물로 사준 것이다. 비록 지금은 헤어졌지만 손에 익은 물건이라 버리지 않고 쓰고 있다. 물론 여권케이스를 볼 때마다 그녀가 생각나는 것도 아니고 미련이 남아서도 아니다. 그저 나의 지나간 출장에서 짬을 내 짧게나마 여행을 했던 기억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지갑도 뒤져보니 환전도 제법 해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시간이 오전 8시, 씻고 호텔 조식을 먹고 천천히 뭘 할지 생각해 보자. 호텔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음식 또한 굉장히 담백하고 좋다. 반숙한 달걀의 노른자를 터뜨려 빵에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프런트에 있는 관광 가이드 책자들을 집어 들어 로비에 있는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아니다.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모르는 기회가 맞는 표현이다. 그동안 늘 꿈꾸던 거리의 카페 한 구석에서 조용히 책을 보기로 했다. 방에 올라가 외투를 걸치고 목도리를 단단히 맸다. 그새 감기가 나았나? 감기 기운이 싹 사라졌다. 목도리를 단단히 매고 지갑과 책을 챙겨 방문을 나섰다. 핸드폰은 두고 가기로 했다. 여기 있는 동안은 회사와 친구들과의 연락은 가능하면 하지 않고 철저히 아날로그로 지내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혹시 모를 회사의 급한 일 때문에 연락이 올까 봐 걱정이 된다.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나는 휴가 중이다. 나는 휴가 중이다. 

이전 05화 약봉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