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는 취향이 아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보통 인간의 눈은 초당 200 프레임까지 인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창문 대신 200 프레임짜리 스크린을 걸어두면 이게 실제 풍경인지 아니면 노래방 TV에서 재생되는 멋들어진 풍경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애석하게도 인간은 고도로 발전한 디지털 환경과 아날로그 환경을 구분하지 못한다. '에이- 그래도 설마 그걸 구별 못할까?' 싶다면 매일같이 듣는 음악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비가청주파수를 잘라낸 디지털 음원을 들으며 이 감각이 실제 소리라고 인식한다. 그리고 감상에 젖어 눈물을 흘린다. 이쯤 되면 인간이 느끼는 감각이 아날로그냐 디지털이냐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이미 인간이 느끼는 감각의 상당 부분은 디지털 자극으로 대체되었다.
각종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급격한 디지털화에 반대해 아날로그로 회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근데 그 예로 든다는 게 -LP로 음악을 듣고, 디지털 매체 대신 종이매체로 콘텐츠를 소비한다- 따위의 것이다. 과연 LP판과 종이매체를 사용하면 아날로그적인, 인본주의적 인간이 되는 것일까?
앞서 말했듯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구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 앞으로는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애초에 디지털은 그저 표현 방식에 불과할 뿐이다. 연주가 LP가 되고 LP가 CD가 되고 CD가 스트리밍 음원이 되었다고 해서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느끼는 자극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했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미를 죽이고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인지 아날로그인지 형태를 따지는 대신에 라이프 스타일과 취향을 따지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LP와 스트리밍을 나누기보다는 재즈와 EDM에 대해 토론하고 종이책과 e북을 나누기보다는 시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 더 많은 기술과 더 빠른 진보로 더 다양한 취향에 주목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이 지금보다 더 많이 디지털화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