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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Nov 06. 2020

네 가지 빛

가을

1. 수반


10여년 전 거제도에 갔었다. 2월초, 남도라 하더라도 사방은 아직 꽁꽁 얼어 있고 소나무와 대나무의 푸른 빛 외에는 모두 회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찬바람이 세상 빛을 모두 벗겨낸 것처럼 온통 탈색된 파스텔 톤 뿐이었다.


그 때 붉은 빛이 눈을 때렸다. 수반에 떠 있는 동백이었다. 나무 밑에 우두두 떨어져 있을 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돌 수반에 무더기로 모아 놓으니 강렬했다. 찬 바닷바람과 함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잊히질 앉는다.


옹기 수반은 그동안 자리를 잡지 못해 천덕꾸러기였다. 얼마 전 흙을 털어내고 물을 부어 두었더니 벚나무 이파리가 제집인양 편안하게 들어앉았다.


마당을 정리하다 흰 국화 몇 송이가 떨어졌다. 덕분에 향은 진하게 퍼지는데 아쉽고 안타깝다. 수반이 생각났다. 그리고 오래된 동백꽃의 기억도 떠올랐다. 이왕에 떨어진 흰 국화를 주워들고, 멀쩡히 바람을 타던 노란 국화 모가지를 댕강 꺾어 수반에 띄웠다. 사라져 가던 빛이 살아났다.









2. 억새


태양이 기어이 산을 넘어왔다. 엉금엉금 기어오르느라 땀께나 흘렸을 태양을 가장 먼저 반기는 건 밤새 추위에 떤 벌레들이다. 먼지만한 벌레들이 펼치는 어지러운 춤사위로 산골 아침은 언제나 소란스럽다.


다음은 억새 차례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온몸으로 빛을 빨아들인다. 눈부시게 흰 빛에 감탄하며 카메라로 역광에 맞서보면, 아뿔싸, 날카로운 빛에 베인 억새가 거기 있다.














3. 곶감


장터에서 만난 할머니에게서 땡감 반접을 2만원에 샀다. 크기도 적당해서 열심히 깎아 걸어놓고 보니 부족하다. 다음 장날, 일부러 그 할머니를 찾았더니, 한 접에 2만원이라신다. 1주일 만에 반값이 된 건지 아니면 1주일 전에 덤탱이를 맞은 건지? 웃으며 반접을 더 사서 깎아 매달았더니 창이 꽉 찼다.


이른 아침, 햇빛이 길게 창을 넘어오면 창밖에 걸어둔 곶감도 따라 들어온다. 사진 찍겠다고 부산을 떠는데 바람이 분다. 곶감도 흔들리고, 그림자도 흔들리고, 그림자를 태우고 들어온 햇살도 흔들린다.











4. 투망


그물을 간추릴 때부터 지켜보았다. 도촬 준비를 끝내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다. 햇살을 거칠게 걷어차는 물빛과 어부가 던질 그물의 동선을 고려해 화각을 잡았다. 걸음을 옮기며 물속을 살피는 그는 한없이 느긋한데 정작 내 쪽에선 긴장감이 높아간다.


지금이다. 투망은 던져졌고, 나는 사진을 찍었다. 어부와 그물, 그리고 물빛과 햇빛이 담겼다. 순간 방심에 피사체가 한가운데 박혀버렸지만 대수롭지 않다. 저녁 햇살이 거기에 있다.



#동백 #국화 #수반 #억새 #곶감 #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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