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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Dec 14. 2020

여름 2

한여름밤의 꿈


별 뜻이 있어 한 말은 아니었다. 앉아 있으면 하품이 나고 몸이 뒤틀리긴 했다. 그렇지만 이따금 들르는 시청 도서관에서도 그런 걸 보면 딱히 책상 탓만은 아니었다. 나름 하는데도 탄력이 붙지 않고 성적도 제자리걸음이라 짜증이 나던 차에 그냥 던져본 말이었다. “맘에 안 들어. 집중도 안 되고 졸리기만 한 게. 책상이 나랑 안 맞나봐!”


아빠 직업이 목수란 걸 새삼 깨달았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일주일 후였다. 친구 집에서 한나절을 보내고 저녁 어스름에 집에 왔다. 먼발치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들마루에 책상이 세워져 있었다. 전등불 아래서 나뭇결이 도드라져 보였다. 드라마를 통해 유명해진 ‘독서실 책상’이었다. 좁은 칸막이를 양쪽에 세우고 머리 위에는 책꽂이를 얹었고 그 아래에는 조명을 달았다. 독서실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누가 만들었는지, 누구 건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집짓는 대목 일을 하지만 아빠는 가구 만드는 소목 출신이었다. 식탁이며 의자, 책장, 다과상을 힘 들이지 않고 뚝딱 만드는 걸 보면서 컸다. 책상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천천히 다가갔다. 집에서 나온 아빠얼굴에는 수줍음이 가득했다. 눈짓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책상 핑계는 이제 그만!’ 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맘에 들어?” 묻는 목소리에서는 설레임이 느껴졌다. 


맞잡고 방으로 옮겼다. 전에 쓰던 ‘집중도 안 되고 졸리기만 한’ 책상은 바깥으로 내쳐졌다. 정리를 하고 밥을 먹는데, 아빠가 말했다. “편백으로 만든 거라 향기가 좋아. 머리도 맑아지고 집중도 더 잘 될 거야.” 어쩌면 아빠는 내 마음 편한 거 하나만 바라보고 삼복더위에 땀을 흘렸겠다 싶었다. 고작 ‘책상 핑계 대지 마’란 말을 생각해낸 게 부끄러웠다.




밤이 되었지만 매미는 여전히 시끄럽게 울어 댔다. 지친 별빛이 창문에 겨우 도착해서는 이내 후텁지근한 열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한 낮 보다는 견딜 만 했다. 선풍기가 만들어내는 바람이 뜨겁지 않았다. 에어컨을 틀자고 하기에도 애매해서 포기했다. 대신 양동이에 물을 받아 발밑에 밀어 넣어 두었다. 얼음도 몇 개 띄웠다. 


책상에 앉아 조심스럽게 발을 담갔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 찬 기운이 순식간에 온몸에 퍼졌다. 선풍기 바람을 따라 나무냄새가 진하게 느껴졌다. ‘이게 편백나무 향인가?’ 하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아빠 말대로 숲에 온 느낌이 들었다. 더위는 사라지고 청량감이 휘감아왔다. 


거짓말처럼 책이 쏙쏙 들어 왔다.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던 미적분도 술술 풀어졌다. 몇 번 읽어 보기만 해도 영어 단어가 외워졌다. 긴 지문이 단박에 해석될 때는 짜릿한 전율을 맛보았다. 밀폐식 구조 탓인지 편백나무 향기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새 책상과 합이 잘 맞는 건 분명했다. 내친김에 세계사 책도 펼쳐 보았다. 춘추전국시대가 눈에 들어왔다. 역사는 흐름이 중요하다는데, 쉽게 파악되지 않아 늘 답답했었다. 이번엔 달랐다. 주나라 말부터 춘추를 거쳐 전국시대에 이르는 550년이 줄줄이 꿰어졌다. 제후와 책사를 중심으로 읽어나가자 딱딱한 역사가 재밌는 이야기가 되는 게 아닌가?


이대로만 된다면,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지겹지 않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몸이 뒤틀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책 속 내용이 저절로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기분이 든다면 모든 게 잘 될게 분명했다. 엉덩이에 힘이 붙어야 한다고 아빠가 늘 말 했듯이 그동안 책상머리에 붙어 있었던 시간이 드디어 보상을 받는 지도 몰랐다. 신기한 건, 새책상에 앉아마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거다. 




모기가 귓가를 어지럽게 돌아다니더니 잠잠해졌다. 다시 집중하려는데 왼쪽 종아리가 따끔거렸다. 오른손으로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렸지만 이미 날아간 뒤였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이번엔 발등에 느낌이 왔다. 서둘러 손을 뻗어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양동이에 있던 물이 사방으로 튀었고, 바닥에 흥건해진 만큼 등줄기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손등으로 비비며 겨우 눈을 떴다. 얼음이 녹아버린 양동이 물은 미지근했고, 뜨끈해진 공기는 눅눅했다. 밤이 되면서 대지가 낮 동안 품었던 열기를 뱉어내고 있었다. 정신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나 잔거지?’ 이마를 올려놓았던 문제집이 제법 축축했다. 꿈이었다. 꿈속에서 미적분을 풀고, 영어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해석했다. 그리고 춘추오패와 전국칠웅의 이야기에 빠졌다가 시황제 정이 천하를 통일하는 걸 보았다. 모든 게 좋았는데, 꿈이라니. 


바닥 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맥을 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책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생생하지? 꿈에서 책을 본 게 맞나? 아니면 잠들기 전에 본 게 꿈에 나타난 건가? 책상은 여전히 달콤한 숲 향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여름 #독서실책상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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