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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Dec 23. 2020

여름 3

옥수수 알맹이는 모두 다르게 생겼다

항상 왁자지껄하다. 소란은 대개 어깨싸움에서 시작된다. 

비좁고 어두운데 워낙 빽빽하게 들어 차 있어서 하나같이 예민하다. 

“그만 좀 밀쳐.” 

“옆에서 미는 거 안보여? 나도 죽겠다구.” 


좀 더 가시 돋친 말이 오가기도 한다.

“넌 왜 이렇게 뚱뚱해서 주변을 힘들게 해? 조금만 가봐?”

“얼씨구, 사돈 남 말 하네. 너도 만만치 않거든? 너나 뒤로 빠져.”


더러 조용조용한 소리도 들린다.

가운데서 몇몇이 머리를 맞대고 수근댄다.

“저기 첫줄에 있는 애들 보이지. 너무 멋지지 않니? 떡 벌어진 어깨, 각진 얼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니? 나는 끝줄 애들이 부럽던데. 피부도 뽀송뽀송하구,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탱글탱글해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져.”

“그러게. 우린 언제 첫줄 애들처럼 될까? 비바람이 불어도 꿈쩍하지 않을 거 같은 저 당당함이라니. 부럽다. 아니아니, 저기 막내 녀석 좀 봐. 속살이 다 비치도록 몰캉해. 칵 깨물어주고 싶다.”


이렇게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소리가 있긴 해도 대부분은 신경 거슬리는 소리다.

앞쪽 등치들이 말한다. 

“가운데 있는 쟤네들 보여? 깎아 놓은 조각상 마냥 매끈하긴 한데, 비리비리해서 난 저런 애들 싫더라.”

“맞아. 겉모양만 번드르르 하고. 저런 걸 어디에 쓴데. 나 정도는 돼야지. 여기 복근 보이지., 어제 밤에 펌핑 좀 했지? 하하하”

엿듣고 있던 가운데 줄에서 빈정댄다.

“떡대만 좋으면 뭐해. 생긴 것도 삐뚤삐뚤하고 균형도 안 맞는데. 나처럼 인물이 좋길 해, 막내처럼 싱그럽길 해.”

“그러게 말야. 자리가 좋아서 그렇지, 지들이 잘나서 큰 건가? 별꼴이야 정말.”

막내들도 거든다.

“자기는 우리처럼 병아리 시절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쑥 커졌나? 자랑할 걸 자랑해야지.”

“얘 얘, 참아. 얼마 지나지도 않은 올챙이 시절 잊고 사는 애들이랑 무슨 얘길 해. 덩치만 컸지 머리는 나쁜 게 분명해.”


혼잣말도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한다. 

첫줄에서 누군가 중얼거린다. 

“난 왜 이 모양 일까? 찌그러진 데다 볼 품 없이 크기만 해.”

“그치? 반듯하게 잘 생기길 했나, 풋풋하길 하나. 내세울 게 하나도 없어.”

가운데 줄에서는 짜증이 새 나온다. 

“여긴 너무 빽빽해. 숨도 못 쉬겠어.” 

“그리고 똑같이 생긴 애들이 너무 많아. 개성도 없고. 난 왜 여기서 태어났지? 지지리 운도 없나봐.”

막내 중 하나는 아예 슬픈 목소리다. 

“너무 늦게 태어났어. 여름이 끝 나가는데 아직 살이 이렇게 무르니 어떻게 해? 언제 형들처럼 큰담? 막내라고 맨날 놀림만 당하고. 억울해”




<옥수수> 알갱이를 하나하나 떼어보면 모양이 제각각인 걸  쉽게 알 수 있다. 다양한 모양이 서로 어우러지지 않으면 옥수수 한 송이가 채워지지 못한다.

“수염이 까매진 것만 꺾으면 돼요. 더 두면 야물어져서 못 먹으니까 웬만한 건 다 꺾읍시다.”

남자가 말하자 여자가 대꾸한다.

“난 몰라. 당신이 해요.” 

“아무거나 꺾으면 되는데 뭘 모른데? 알았으니까 구경이나 해요.”

대궁 사이를 걸어가며 옥수수를 꺾어 나가던 남자가 말한다.

“이건 벌써 너무 여물어 버렸네. 딱딱해서 못 먹겠다. 저건 며칠 더 걸리겠고.”


금세 한 소쿠리를 꺾어 담은 두 사람은 서둘러 껍질을 벗긴다.

크기도 제각각, 여문 정도도 다 다르다. 

빈틈없이 매끔하게 생긴 것도 있고 듬성듬성 성긴 것도 있다.

남자가 말한다.

“한날한시에 심었는데 어째 이렇게 다 다를까.”


삶은 옥수수 바구니를 들고 둘은 개울가로 내려간다. 

발을 물에 넣자 땀이 싹 가신다.

옥수수에서는 아직 김이 난다.


“어떤 게 맛있어? 하나 골라 줘봐.”

“똑같은데 뭘 골라. 이왕이면 이쁜 걸로 먹던가.”

들여다보던 여자가 하나를 집어 든다.

“알았어. 이걸로 먹어야겠다. 당신도 얼른 먹어봐”

손에 쥔 옥수수를 이리저리 뜯어보던 여자가 말한다.

“난 이 끝부분이 맛있더라. 물렁해서 씹기 좋아.”


<옥수수> 송이마다 모양도 크기도 다 다르다.

남자가 중얼거린다.

“신기하지? 작년 가을에 종자 한다고 딱 한 송이 남겨뒀거든. 그러니까 이게 다 같은 송이에서 나온 거란 말이지. 근데도 나무마다 크는 속도가 다 달라.”

여자가 대답한다.

“송이마다 생긴 것도 크기도 다 다르고. 더 신기한 건, 같은 송이 안에서도 알갱이마다 다 다르다는 거야. 생긴 것도, 여문 정도도, 맛도.”

“어쨌든 같은 옥수순대 뭐. 골라먹는 재미가 있으니까 더 좋잖아. 근데 옥수수 참 맛있다.”


옥수수를 한 입 베어 물고 남자가 고개를 든다.

노란 속 씨를 톡톡 깨물으며 눈길을 산으로 보낸다.

뜨거운 여름 해가 바람 한 점 없는 나뭇잎위에 내리 꽂히고 있다.

“그나저나 개울에 발 담그고 옥수수 먹으니까 진짜 여름 같다.”


#여름 #옥수수 #세상에똑같은나뭇잎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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