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충각(蟲刻)

by 풍연


지난해 가을,

은행나무 똥가리로 커피 여과지 받침을 만들었습니다.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거리다 보니

나름 흡족한 모양이 나와

지금껏 잘 쓰고 있습니다.


몇개 더 만들어 볼까 하고

나무를 잘라 껍질을 벗겼습니다.


아뿔싸, 벌레가 갉아먹은 자국이 있습니다.

껍질 밑 목질에 새겨진 문양에

가루가 촘촘합니다.


조각도로 조심스럽게 긁어냅니다.

가루가 다식처럼 뚝뚝 떨어집니다.

그리고 떨어져 나간 자국에

무늬가 선명합니다.


무슨 벌레인지는 모르지만

솜씨가 대단합니다.

레이저로 따 낸 것처럼 정교해서

이가 빠지거나 이그러진 곳이 한 곳도 없습니다.

일정한 깊이에 바닥도 메끄럽습니다.


유려한 곡선이 종횡무진 거침이 없습니다.

도드라진 입체감이

기괴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벌레먹은 나무라

처음엔 버려야 하나 했는데,

두고보니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의도치 않게 음각을 한 게 되었습니다.

벌레가 만들었으니

충각(蟲刻)이라 이름 붙여 봅니다.


한 때 서각(書刻)을 배워볼까 한 적이 있었는데

포기해야겠습니다.

'벌레만도 못한' 솜씨라

이보다 멋진 작품을 만들 자신이 없습니다.


처음 만든 여과지 받침은 아래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piano1445/19


왼쪽은 지난해 가을 것이고, 나머지 두개는 이번에 새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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