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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글그림 Feb 18. 2023

227. 각자의 할 일


































이번 정월 대보름에는 샛노란 보름달이 떴다.


평소에는 추워서 낮에 뛰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달이 보고 싶어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다가 나갔다.

하지만 너무 일찍 나간 탓인지 아니면 구름 사이 어디쯤에 숨어 계신지 달님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있을까 어디서 떠오를까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슬렁슬렁 뛰어보는데

돌던 코스를 다 돌아도 찾을 수가 없어 이대로 들어가야만 하나 아니면 한 번 더 뛸까를 고민하던 찰나에

만났다. 너무 보고 싶던 달님이 건물사이에 샛노란 얼굴을 빙글 내어놓고 계셨다.


반가워 터지는 함박 웃음과 함께 보고 싶었다고 

오늘은 2023 1월의 당신은  만날  알았다고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어릴 때는 달님에게 소원을 비는 행위가 제법 간절했다.

따로 종교가 없던 나는 정월대보름을 항상 기다렸고

굳이 보름이 아니더라도 달님이 보이면 수시로 말을 걸었다.

내가 특별한 날만 안부를 묻는 그런 사람 아니라는 것을 어필하며

소원을 다 빈 다음에는 항상 감사 인사도 함께 지금도 충분히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처음은 분명 얻길 바라는 뭔가가 있던 흑심 가득한 관계였는데

수십 년에 걸쳐 그런 은밀한 대화를 이어오다 보니 어느새 달님은 나에게 신이라기보다

친한 동네 언니같이 되어 있었다. 세상 편한, 그리고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그 사이 이루어진 것도 있고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도 있고

나는 알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달님은 언제나 정말 소원을 잘 들어주셨다.

그 누구도 달님이 소원을 이뤄주는 존재라고는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지만 나는 여전히 달님에게도 소원을 빈다.

그 어떤 신보다 내 소원의 역사를 다 아는 달님이

그래서 별 말도 안 되는 소원들까지도 거침없이 편하게 다 털어놓을 수 있는 달님이 좋다.



언제나 지금처럼 잘 들어주고 잘 지켜봐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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