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관에 봉착하면 역사에서 답을 찾는다.
그때와 지금이 결코 같지 않으니 그때의 답이 지금의 해답은 되지 못한다 해도
분명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위안이라던가.
10대 시절 그렇게 아버지가 반대를 해도 그림을 그렸고,
20대 시절 그렇게 돈이 없어도 돈을 벌 수 있는 일들을 찾아가며 계속 그림을 그렸고,
30대 시절 그렇게 몸이 아파도 아주 잠깐 그림이 미웠을 뿐 운동을 하면서 다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간신히 그림으로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데도 나를 받아주는 회사가 없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청와대로 간다는 심정으로
더 작정하고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나 실컷 그리자 하고 들어간 학교에서 만든 작업들로 재밌는 일들이 많이 생겼다.
그 뒤로도 빵 뜨지 못한 창작자로서 돈 벌기와 하고 싶은 작업 사이의 줄다리기는 계속하고 있지만
허투루 먹지는 않았던 나이테를 바라보며 그래 어지간해서 헤어지진 않겠구나 어떻게든 같이 살긴 살아지는구나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보다 잘 살기이지 어린 날처럼 영영 못 그리게 될까 봐 혹은 정말 포기해야 되는 걸까 하는 두려움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구직을 해야 하는 시기에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게 좋을지 아니면 좋아하는 건 취미로 두고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게 좋을지를 많이 고민한다.
좋아하면 잘하게 되어 있어 라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하기보다 나의 경우는 그냥 후자가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취미로만 둘 수 없었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할 수가 없었다. 그림에서도 좋아하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회사를 다닐 때는 몸이 많이 아팠다. 꾀병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증상에 어떻게든 좋아하는 것과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나에게는 생존이 걸린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그리고 이 문제 풀이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일로서 그리는 그림 틈틈이 좋아서 그리는 그림을 그리며 어떻게 하면 이 둘 사이 간격을 최대한 좁힐 수 있을지 아주 긴 수식을 거쳐야만 풀 수 있는 수학문제처럼 혹은 수차례의 실험을 거쳐 어렵게 증명을 도출했지만 또 다른 변수가 닥쳐서 처음부터 다시 실험에 돌입하게 된 과학 문제처럼
어렵지만 꼭 풀고 싶은. 정답이 분명히 있을 것만 같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앞으로도 함께 잘 풀어 갈 수 있기를.